구약/창세기

창4:16-26 진정한 찬양을 하는 사람들

행복으로초대 2022. 9. 11. 12:37

금오교회 찬양위원회 헌신예배 

1.인사

22년만에 고향교회에 돌아왔습니다.

2번 예배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말씀을 통해 만나뵙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귀한 강단을 허락해 주신 김성호 담임목사님과

당회 장로님들,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음에도

목회자로서 처음 발을 땔 수 있도록 해주셨고

응원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게다가 오늘 예배 그림이 참 좋네요.

형님이 사회를 보고 동생은 설교를 하고

북치고 장구치고 라고 하나요?

 

2.찬양위원회 헌신예배라

찬양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3.질문?

금오교회에서 찬양을 제일 잘 하는 사람?

하면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여러분의 생각 속에 누군가 생각이 났다면,

그 사람을 그 대로 생각하면서

다음 말을 적용해 보십시오.

 

4.저를 따라해 보세요.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고백이다.

찬양은 음악이 아니라 고백이다.

 

음치/박치 성도:

저는 찬양을 잘 못해요? 맞는 말일까요? 틀렸습니다.

찬양은 노래가,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음정,박자와 관계가 없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며,

사랑의 고백입니다.

 

5.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고 찬양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래를 못 한다고 찬양을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5.제가 고등학교 때, 저를 부끄럽게 했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때는 소풍을 가면 한 명씩 나오게 해서 장기자랑을 했습니다.

주로 노래를 부른다든지, 춤을 췄습니다.

저는 노래 좀 한다고 소문이 나서 장기자랑하면 언제나 1번이었고

반대표로 나가 노래 불렀던 때입니다.

장기자랑을 하는데 함께 SFC운동원.

SFCSTUDENT For CHRIST의 줄임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학생. 다른 말로 학생신앙운동원입니다.

함께 SFC 학생신앙운동하던 친구가 앞에 나와 우쭐우쭐 하더니

'일일송정 푸른 솔은 흘러흘러 갔~어도'

아이들이 일제히 우~~~~~~~~ 하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문제는 그 친구 바로 앞 순서로 제가 멋지게 인기가요 한곡 뽑고

아이들의 환호성을 받고 난 후,

나 이런 사람이야!~~하고 어깨 뽕이 한층 올라갔을 때입니다.

뭘 좀 아는 친구들이 야!!!

창태야 너도 교회다니잖아 가곡 불러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일일송정 다 못부르고 강제로 끌려내려온 그 친구에게

"~" 라고 하니까 그 친구가 제게

"아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할걸 그랬네"이랬습니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시 인기 가수들 노래 잘 부르고

락이나 메탈음악 좋아하고 장기자랑에서 한껏 노래 실력 자랑했던

저를 부끄럽게 했던 사건입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고백입니다.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프로포즈를 거창하게 준비했습니다.

멋진 장소에서 비싼 다이아반지에 꽃과 촛불로 가득 채우고,

사랑넘치는 문구로 현수막도 걸고

나와 결혼해줄래~~했는데,

싫어~이러면 어떻게 되는거죠?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받는 것입니다.

찬양이 노래가 아니라 고백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할 때, 나에게 반드시 해야할 질문?

하나님께서 내가 부르는 찬양을 받으시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실력있는 반주자와

화려하고 멋진 조명과 음향, 영상으로

성악가와 세션이 가득해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

베푸시는 은혜 속에 넘치는 기쁨과 감사함이

녹아있는 삶의 고백을 받으십니다.

 

예화) 한소리 찬양단 찬양인도자

피아노한대 있어도 그 때 베풀어주신 감동과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른 찬양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기뻐받는 삶에 대해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진실된 삶의 고백을 담아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고백은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사랑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가

찬양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는 라멕의 노래입니다.(23-24)

칼의 노래라고 하고

분노, 복수, 살인을 자랑하는 노래였습니다.

 

왜 라멕은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살인을 하면서도 자랑할 수 있는

뻔뻔하고 양심도 없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이 노래는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보면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렸습니다.

유리 방황하는 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벌만 내리시는

징벌의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생명 만큼은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겠다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가인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 하님께서 벌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가인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지켜주시겠다고 은혜를 베푸셨는데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지키심을 거부하는 인생.

이것이 바로 가인의 인생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인생이

가인의 인생입니다.

그 가인의 인생을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힌 결정판이

바로 라멕입니다.

그래서 라멕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권력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과 싸우고 또 싸우고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복수하고 살인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23~24절의

칼의 노래입니다,

 

이런 칼의 노래를 부르는 라멕.

그의 이름 또한 칼의 노래와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사람마다 이름의 뜻이 있습니다.

제 이름은 창태입니다

창성할 창. 클 태.

큰 사람이 되어라는 소원이 담겨있을 겁니다.

성경에서는 낮은 사람, 작은 사람 되라고 하는데

이름부터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태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너무 강하고

경상도 이남에 사시는 분들 중에는

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김창대 목사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창태 라고 해보십시오. 창 태. 잘 하시네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을 너무나 잘 알아서..

그래서 저는 이름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느날 저에게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멋지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창태야~너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첫 이름이다

? 무슨 말씀이신지....

성경의 첫 번째 책이 뭡니까? 창세기

성경의 첫 글자가 뭡니까? 태초에

그래서 창세기의 창과 태초에의 태. 둘이 합쳐 창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석해 주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때부터 할렐루야의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좋은 이름으로 해석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라멕은 이름은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기 전.

창태. 큰 사람과 일맥상통합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의 뜻은 '강한 자'입니다.

라멕은 자신의 이름대로 강하게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없이 강하게 사니까 문제입니다.

하나님 없이 강하게 사는 인생 그것이 라멕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라멕 혼자만 하나님 없이 강하게 살았을까요?

저기도 라멕, 저기도 라멕. 저기도 라멕.

온 세상 천지에 라멕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힘,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사는 세상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며 약하면 죽음을 당하고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세상.

모두 라멕이 되어서 치열하게 다투고

싸우고 죽이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분쟁하고 살인하고

죄를 짓고도 오히려 죄를 자랑하고

살인을 자랑하고 힘을 자랑하는 시대.

이것이 라멕이 살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휩쓸려 살아가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게 살라고

25~26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425~26절 같이 읽겠습니다.

 

25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다른 씨.

다른 말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에 빠진 아담과 하와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26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6절을 잘 풀어봅시다.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땅에 번창하고

결국은 모두 라멕이 되는 시대.

라멕의 시대. 칼의 시대, 분노의 시대,

살인의 시대, 복수의 시대, 칼의 시대에

라멕처럼 자신의 힘과 능력을 위해서만 사는 시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자신의 이름만을 위해 사는 시대

결국 자기 이름만 부르는 시대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다 자기 이름만을 위해 살더라도

너희들 만큼은, 예 우리들만큼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겠다고

작정하고 결심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사람들.

세상이 보기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공적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부르다는 원어가 도움을 청하다' 이며

도움을 청하다는 말이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는

'찬양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통하여서

찬양의 시대, 예배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시대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신앙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찬양 아시죠?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는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는 찬양하리라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곳.

그곳이 여러분의 가정일 수 있습니다.

외로이 나 혼자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고

하나님~~도와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직장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예배하며

살아가기로 작정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곳에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비로소

비로소 의 뜻은 어떤 일이나 현상이

다른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오랜 기다림 끝에 처음으로 시작되다/ 이런 뜻입니다.

 

비로소라는 단어는 반드시 전과 후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로소 뒤로는 처음으로 무엇인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전까지는 제대로 된 예배나

제대로된 찬양이나

제대로된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경건한 삶의 모습이 없었는데,

비로소 이때부터 제대로 된 예배가

공적으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계기일까요? 어떤 사건일까요?

26절에 보세요.

셋도 아들을 낳았고 셋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을 때"

바로 그 때!

그 때에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럼 에노스의 이름 뜻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복습! 라멕의 이름 뜻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지혜와 지식으로 똘똘 뭉친

똑똑하고 눈치빠른 금오교회 성도 여러분!

그럼 에노스의 뜻은 무엇일까요? '약한 자'입니다. 약한 자!

약함을 조금 더 풀어보겠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깨지기 쉬운 상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병든 상태.

재난을 당하거나 고통 가운데 있는 상태.

이것이 에노스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라는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기가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의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질병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어려움 없이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한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삶이 꼭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결혼하고 사랑의 귀한 열매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가 심각한 질병을 안고 태어나

태어나자 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서

생명줄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겨우겨우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 아빠의 마음이 어떨까요?

아기가 아니라도 별거 아닌 줄 알고 병원에 갔는데

검사결과 생각하기도 싫은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의.

깨기지 쉬운.

너무나 연약한.

곧 죽을 것 같은 그 에노스.

이 죽음의 공포는 너무나 큽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아담과 하와는 여전히 살아있거든요.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죽음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자기는 안 죽었지만 육체적인 죽음을 실제로 본 사람입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사랑하는 아들 아벨의 죽음을 본 사람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지 압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셋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아기를 살릴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하나님~~~

도와 주세요. 제발 우리 에노스 우리 에노스 고쳐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에노스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을까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역으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까지 연결된 족보에

당당히 에노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매달렸던 이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에노스를 살려주셨다!.

할렐루야! 이것이 에노스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라멕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싸우고 경쟁합니다.

자기 이름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부끄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자랑하는 칼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아무도 예배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찬양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가는 불신앙의 시대였는데,

 

그 때 에노스가 나타났습니다.

에노스는 약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너무 초라하고 너무 연약합니다.

그런데 그 약함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시대,

예배의 시대, 찬양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진정한 찬양이 시작됩니다.

한계에 부딪친 순간,

마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순간.

진정한 찬양이 시작됩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깨지기 쉽고

아프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진정한 찬양이 시작됩니다.

기도 밖에는 없고 예배할 수밖에 없고 찬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그 순간

진정한 찬양이 시작됩니다,

바로 에노스의 은혜입니다.

나는 에노스다.

나는 에노스다!

나는 에노스다!

이 때 진정한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은 내가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방법입니다.

약해질 때, 찬양하십시오.

아플 때, 찬양하십시오.

힘들 때, 찬양하십시오.

그때, 에노스의 은혜. 약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한 에노스의 역전을 경험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은혜의 포지션에 서라!

여러분은 하루의 시간 중에 찬양을 얼마나 하십니까?

우리에게서 점점 찬양이 사라져 가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에노스!

죽을 수 밖에 없는.

깨지기 쉬운 상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병든 상태.

재난을 당하거나 고통 가운데 있는 상태.

사실 이런 극단적인 상태는

우리의 인생에서 몇 번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저 평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출근하고 일하다가 밥먹고

일하다가 퇴근하고 밥먹고

놀다가 야식먹고 잠들고

사실 그다지 정말 내 인생을 찢어낼 듯한

큰 사건이 계속해서 연속으로 일어날까요?

평범하게 삽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영적인 허리띠를 풀어놓게 합니다.

 

이 때, 내 삶에 당연한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십시오.

깊은 잠을 잘 수 있고, 잠에서 깨어날 수 있고,

아침 햇살을 맞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씹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달릴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음이

평범함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바꾸십시오.

 

사실, 헌신예배 강사로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받았을 때

? 내가? 다른 훌륭하신 목사님들 놔두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성도들이 싫어할텐데.

담임목사도 아니고 아직 부목사인데

헌신예배 인도한다고 하면 성도들이 별로 안좋아할거야~

 

그런데 헌신예배인데, 찬양위원회 헌신예배라고 해서

다시 기도해 보고 연락주께요 라고 했습니다.

사실, 202112월 말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라고 기도할 때, 찬양에 대한 너무나 강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셔서

말씀을 받고 찬양은 무엇입니까? 라는 시리즈로

올해 7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도 그 7편의 설교 중 한편입니다.

그렇게 찬양에 대해 마무리를 지었는데

제가 너무나 그리워하는 저의 고향 금오교회에서

찬양위원회 헌신예배를 인도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에 대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실 때,

눈물을 한바가지 흘리면서 찬양,

즉 고백하게 하신 찬양곡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운전하다가 오죽하면 자면서 꿈속에서

이 찬양을 부르면서 꿈속에서 울면서 찬양 속에 살았습니다.

은혜라는 찬양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