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입은 자(창세기6:1~12)
존 뉴턴을 아십니까? 뉴턴은 1725년 영국에서 믿음이 좋은 어머니와 배를 타는 선장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세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며, 성경과 찬송가와 시를 외웠습니다. 그런데 뉴턴이 일곱살 때 그만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뉴턴의 삶은 180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불우하고 불량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열한 살 때부터 배를 타는 선원생활을 시작했는데 불량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나쁜 일들을 배우며 점점 나쁜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18세에는 해군이 되었지만 탈영하다가 붙잡혀서 결국은 아프리카로 가는 노예상선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에로 사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기에는 그 당시 자신에 대해 노예를 섬기는 노예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노예상인의 노예의 심부름을 하는 노예였으니까요. 그후 노예상인에게서 일을 배운 뉴턴은 자신도 노예상선의 주인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 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뉴턴에게는 늘 내면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성경의 말씀과 세상의 악한 가치관, 이 두가지가 내면에서 항상 싸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악이 이겼습니다. 왜요? 노예생활 가운데 느낀 것이, 약하면 이 세상을 못살고, 강해져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상인의 생활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는 무시하고 양심에서 들리는 가책의 소리를 꾹꾹 누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되지않고 배가 침몰할 지경이 되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풍랑 속에서 뉴턴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세상의 방법을 따른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던지. 하나님이 계속 말씀해 주셨는데, 그 음성을 멀리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던지, 그는 드디어 하나님 저는 오늘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보좌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풍랑이 지나가고 잔잔한 바다가 되고 생명을 건지자 그는 펜을 들어 시 한편을 썼습니다. 들어보세요.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어메이징 그레이스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찬송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뉴턴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님이 되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옆에 있는 분에게 축복합시다. 생명을 위협하는 거센 풍랑같은 세상의 거센 도전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악한 상황 속에서 보호하시고 돌보시고 생명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또 한 사람을 오늘 말씀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저는 창세기 6장을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왜냐하면? 6장 1절부터 7절까지 묵상하면서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픕니다. 더더욱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면서 1절~7절까지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렸을 때, 그 마음이 느껴져요. 또는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그 사랑은 몰라주고 자식이 맘대로 떠나버렸을 때, 그 아픈 마음이 느껴져요. 그런데 7절까지 그 답답하고 아프고 찢어질 듯한 가슴을 한순간 시원케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과 구별되게 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제가 좀 전에 6장 1~7절까지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지 묵상하며 읽으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아픔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1절: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가 인의 후손을 말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나오고 가인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후손은 세상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야발로 대표되는 경제권을 가진 자, 유발로 대표되는 세상문화의 주도권을 가진 자, 두발가인으로 대표되는 군사력,권력을 가진 자들이 되어 세상에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 반대편에 있는 셋의 후손들은 영적세계의 주도권을 가진 자였지만 셋의 후손은 그 주도권을 놓치고 맙니다.
‣2절: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을 말합니다. 셋의 후손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말하면서 그들이 영적세계의 주도권을 쥔 하나님의 신앙의 영적세계를 책임지는 자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변합니까? 사람의 딸들 즉, 가인의 후손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됩니다. 지금도 예수믿는 여자청년들보다 예수 안믿는 여자청년들이 예쁘기는 더 예쁩니다. 왜냐하면 제약없이 꾸밀 수 있으니까요? “아름다움을 보고” 예 볼 수 있습니다. 여자 성도님들! 가끔씩 남편과 길을 가다가 남편들이 예쁜 여자를 보고 고개나 눈이 돌아간다 할 때, 화내거나 변태취급하거나 부부싸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거든요. 만약 고개가 눈이 안돌아가면 내 남편이 좀 문제가 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면 “아! 내 남편이 남자로서 건강하구나!” 이렇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ㅎㅎ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아름다움을 보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들이 좋아하는”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가 좋아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좋아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데 “자기들이 좋아하는”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면 그것을 함께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손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했고 그리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3절에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이 되었다고요? 육신이 되었다. 영적인 셋의 후손이 육신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후손의 문제가 생깁니다.
‣4절:육신적인 세상 사람들이 되어버린 셋의 후손들로부터 경건한 영적후손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네피림이 태어납니다.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전쟁과 살인의 능력자, 요즘 유행어 가운데 능력자, 종결자 이런 말이 있는데 전쟁의 능력자, 종결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적 힘의 사람들이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더욱 번성하는 반면. 하나님의 가슴은 찢어집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래서
‣6절에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그리곤
‣7절에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런 답답하고 슬픈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빛을 발합니다.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만약 8절 말씀이 없이 9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바로 이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인간의 행위만 남습니다. 하지만 노아가 의인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던 이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세상은 죄악의 풍랑 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가인의 후손 뿐만 아니라 영적인 셋의 후손들마저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세상적으로 변해버린 시대였습니다. 주변에 함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가족들이, 친구들이 하나둘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언젠가부터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들 음란에 흐느적 흐느적, 음악에 젖어 술에 젖어 흐느적 흐느적 합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세상은 통제불능의 상황에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말하고 신앙문제를 꺼내면 “너는 아직도 하나님 찾고 있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때문에 외톨이가 되어 보셨습니까? 안되본 사람은 모릅니다. 담배한번 피워보지 않았던 신앙좋던 청년들이 군대를 가면 담배를 배워올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휴식시간만 되면 옹기종기 모여서 뻐끔버끔 다들 담배물고 있거든요. 외로워요. 저는 대학교 3학년 2학기때부터 ”야 김목사“라면서 친구들한테 놀림 아닌 놀림을 받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대하교때 좀 마셨습니다. 그러다 3학년이 되면서 모든게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이 창태 목사된다고 이제 술 안시고 콜라마신데, 그러면서 콜라시켜주면서 야 김목사!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모임도 별 재미가 없고 또 다른 친구가 생기더라구요. 제가 좀 놀때, 제게 늘 SFC 가자고 징그럽게 쫒아다니던 친구였습니다. SFC가 뭔지 모르신분 계십니까? 사이다 판타 콜라의 줄임말이 아니고요. student for christ 기독학생 동아리입니다. 세상적인 친구는 자꾸 멀어졌습니다.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만날때마다 야 김목사 제 별명이 김목사였습니다. 그 놀림대로 저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요즘 청년대학부에 이제 갓 대학교에 입학한 우리 1학년 청년들이 고민이 많아요. 말로만 듣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는데 MT다 개강파티다 무슨 모임이 있으면 안가려고 해요. 왜냐하면 모임마다 술이 빠지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난 그런 자리 안가? 라면서 참석을 안해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 사귀기도 힘들고 어울리기도 힘들고,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고민이 많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해서 그런 술판대학교에서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보자라고 해서 기독교동아리에 가입을 많이 했어요. 대학들어가서 처음 행복을 느꼈데요? 대학캠퍼스에서 경건한 사람으로 구별되기 위해서. 참 기특하지 않아요?
설교를 듣으면서 오해하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절히 아닌 구별임을 기억하십시오. 전쟁으로 말하면 최전선, 국경선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선이 그어지는 그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하는 것이 항상 우리의 고민이요 갈등입니다. 지나치게 경건해져서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사는 것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우리가 간직해온 신앙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염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것은 참 힘듭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듭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을 통해 구별되 삶은 세상을 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동하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적인 욕심이 있습니까? 정말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신앙생활! 정말 멋드러진 신앙생활 말입니다. 그렇게 멋드러지게 믿음으로 살았던 노아! 오늘 말씀처럼 노아가 의인으로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한 사람도 그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아가 심판을 면하게 되지만 실상은 노아도 똑 같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의 죄를 이어받았고, 또 그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해서 실수를 하는 것을 보면 노아도 별 수 없는 인간이며 역시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그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 자신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온 가족이 함께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다른 동물들까지 구원을 얻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해서 노아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였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어 심판을 받는 마당에 노아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 그의 가족과 다른 동물들을 구원하게 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구원받은 것이 다른 사람은 다 죄인이었지만 노아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도 역시 죄인이었고,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이웃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사는 것을 보면서 그도 그렇게 살아야 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싸우면 나도 같이 맞서서 싸워야 하고,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면 나도 같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써야 그들에게 당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거짓을 행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때로는 나도 거짓을 행하고 속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를 때 다른 아이들은 다 컨닝을 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를 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의 것을 보고 쓰든지, 아니면 쪽지를 만들어 그것을 보고 베끼든지 해서 들키지만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습니다. 실력 없는 학생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데 나는 정직하게 하고 바르게 하려고 하다가 형편없는 학교에 간다면 나만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나도 손해보지 않으려면 저들처럼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아처럼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시각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보취급을 당하고, 불이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해야 손해 보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아마 노아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인생을 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즐기고,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 다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데 자기 혼자만 그 따분한 일을 계속한다는 것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능대로 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의롭게 살도록 늘 그 마음을 채찍질하셨습니다. 그 속에 죄의 소원이 일어날 때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번이나 죄를 지으면 그 마음이 어찌나 두렵고 불안한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짓고 싶을 때 지을 수 없도록 막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가 의인이며 완전한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간섭하시고 그를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농사가 풍년이 들고, 죽을병이 고침 받는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이런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으로만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은혜이며,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도록 붙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친 물결과 포식자들을 힘들게 통과하며 거슬러 올라가 자기가 난 곳으로 가서 알을 낳는 연어가, 힘들다고. 무섭다고. 괴롭다고. 외롭다고. 헤엄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연어라는 어류는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인, 살기가 힘들다고, 무섭다고, 괴롭다고, 외롭다고, 손해본다고 신앙의 몸부림을 치지 않는다면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꾸만 작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의 몸부림을 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는 능력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헤가 임하면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세상에 휩쓸려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잡으십시오.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으셔야지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