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5:1-7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8-긍휼히 여기는 사람

행복으로초대 2024. 2. 24. 21:49

마태복음 5:1-7 반석 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8 긍휼히 여기는 사람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 여덟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긍휼이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줌'입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결정적인 핵심이 빠져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사전적인 단어, 세상에서 말하는 긍휼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긍휼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두 가지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비유는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두번째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첫번째. 일만달란트 빚진 자 비유를 보겠습니다(18:23-35)

 

한 임금에게 일만달란트 빚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만달란트는 얼마일까요?

1달란트 = 6천 데나리온,

1데나리온 = 노동자 하루 품삯

*1만달란트 = 6천만 데나리온

= 164,383년의 노동자 임금

※한마디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하지만 임금이 긍휼을 베풀어

빚진 종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긍휼을 받은 이 종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잡고

잡아다가 빚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다시 그 종을 잡아서

일만달란트 빚 탕감한 것을 무효로 하고

빚을 갚게 한 비유입니다.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그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요?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야죠.

탕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받은 긍휼대로 자신도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해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땅히 빚진 것에 대해 댓가를 제대로 치러야 했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임금님의 은혜를 받고 

모든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모든 빚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이 때, 당연한 반응은 지난 날 빚졌던 힘든 삶을 생각하며

늘 빚진 자의 마음으로 감사하고 자신이 받은 대로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죠?

이것이 마땅한 삶이었습니다.

 

다음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2.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강도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너무 많이 맞아 거의 죽게 되었고.

길가에 쓰러진 채 버려진 상태로 있었습니다. 

 

이 때,  거의 죽어가는 이 사람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이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며

마음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긍휼은 감정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까지입니다.

(월드비전,굿네이버스,세이브더칠드런 등의 영상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감정만 느끼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가지고 있던 약을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가 타던 나귀에 이 사람을 태우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환자를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3.긍휼의 복을 더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

1)긍휼이라는 말은 ‘엘레오스’ 라고 하고 합니다. 

그 뜻은 ‘함께 아파한다’ 는 뜻입니다.

함께 아파한다는 말은 우리 말로 '공감하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도움이 간절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네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쳤습니다. 

자신들의 질병과 연약함, 고통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아픔과 연약함, 고통에 함께 하시며 그들을 고치시고

공감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이 지극히 개인주의화되고

서로의 관계에 벽을 쌓아가는 세상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공감하는 교회가 긍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왜 공감하지 못할까요?

긍휼히 여기며 함께 아파하는 복된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22:3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을 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질문을 하면 됩니다. 

"내 문제라면 손발 걷고 나서지 않을까?"

"내 가족의 문제라면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

"내 부모, 내 가족, 내 자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반대로 마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이렇게 다윗의 자손이여~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향해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 문제라면? 내 가족의 문제라면? 내 부모, 자녀의 문제라면?

그들이 잠잠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 영주시민교회를 어떤 교회로 세우기 원하십니까?라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영주시민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24가지를 

교회 계단과 식당벽에 부착했습니다. 

그중에 '우리 영주시민교회는 '선교'로 함께 사는 교회입니다'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착한 교회입니다.

영주를 웃게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교회입니다. 

 

이런 약속들은 함께 아파하는 긍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도 앞으로 선교사님들이 찾아오는 교회,

그래서 성도들, 특별히 다음세대가 선교사님들과 함께 사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선교사님들을 맞이하면서

가졌던 마음은 선교사님이라는 생각보다 

내 부모님이 오셨다. 내 형님이 오셨다.

누님이 오셨다. 내 동생이 왔다.

선교사님 자녀들을 보면서 내 아들이 왔다.

내 조카가 왔다는 생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선교사님들이 편한 마음으로 함께 지냈고,

한국에만 오면 다른 곳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 집처럼 

찾아올 수 있는 선교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선교관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생활하다가 만약 가구나 전자제품을 

고장내고 부서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선교사님이 책임져야 된다. 쓰는 사람이 책임져야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생각을 바꿔보세요. 

설날이 되서 부모형제들이 다 모였는데, 조카들이 막 뛰어놀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어요. 그럼 유리창 값 그 조카집에 배상하라고 합니까?

부모님이 티비를 보다가 잘못해서 고장이 났는데,

아버지, 어머니 티비값 물어내고 가세요. 그렇게 합니까?

가족처럼 생각하면 조금 다른 결정을 하게 됩니다. 

힘든 성도들이 있을 때, 같은교회 성도라는 것 외에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받는 복은

=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팔복 중, 가장 독특한 복입니다.

왜냐하면 주는대로 받는 복입니다. 

행하는 그대로 받는 복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 

그에 대한 댓가, 상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단순히 불쌍하다는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마치 거지나 아프리카 뼈가 앙상하게 마른 사람들을 보고

불쌍해서 돈 몇 푼 던져주듯 하는 동정이 아닙니다.

 

고통받고 상처받고 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은 믿음과 별개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긍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나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정'이 많은 민족 아닙니까?

그래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과 우리가 가진 긍휼은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세상의 긍휼과는 다른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도저히 긍휼을 베풀어 줄 수 없는 사람에게조차"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 때문에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긍휼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도저히 긍휼을 베풀어 줄 수 없는 사람에게조차"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십자가 예수님의 긍휼이

우리 안에, 내 안에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도저히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의 긍휼,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이 우리 안에 

내 안에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세상의 긍휼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어렵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깨지기 싫은 겁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긍휼은 자원해서 하지만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긍휼,

예수님의 긍휼은 잘 하지 못합니다.

 

긍휼은 호두같습니다.

딱딱한 껍질같이 강팍한 내 마음을 깨뜨리면

그 안에는 맛있고 영양가 많은 호두처럼

예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긍휼을 받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악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 없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복된 사람이 되려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눈물에 감격,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 감격하고 감사합니다.

그 감격과 감사가 너무 커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권사님 한 분을 심방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와 눈물로 말씀으로 사시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셨던 권사님입니다. 

치매가 있으셔서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권사님께서 삼행시를 하셨어요. 

삼행시 단어가 오백원 입니다. 오백원.

성도 여러분~ 운을 한번 띄워주시겠습니까? 

오 : 오~~~주여

백 : 백만원만 주세요

원 : 원수에게 주려구요.

 

세상과는 다른 긍휼,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 예수님의 긍휼.

그 긍휼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긍휼은 당연한 결과로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불쌍하게 여겨 돕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