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하박국 1장 12~17절) 본문
침묵에 대한 명언들을 찾아봤습니다.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토마스 칼라일)
비록 자기가 올바를 지라도 끝까지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 큰 힘이 있다.(카토)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이다.(죤 드라이든)
하지 않은 말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루이스 코수드)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때 침묵은 분별력 있는 웅변이다.(보비)
만일 그대가 현명하다는 평을 받고 싶으면 그대의 혀를 다물 줄 아는 현명함을 먼저 배우라(프란시스 촬스)
개미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자는 없다. 그런데 개미는 말이 없다.(벤자민 프랭클린)
사람이 말하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배우게 되지만 침묵하는 일은 좀체로 배우지 못한다.(탈무드)
이 외에도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명언이 있죠? '침묵은 금이다' 침묵을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마십시오. 침묵에는 뜻이 있고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어떤 뜻이 있고 어떤 계획과 목표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답답해 하고 초초해 합니다. 하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박국은 3가지 질문으로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악인은 왜 이렇게 형통한 겁니까? 그리고 의인은 왜 고통받습니까?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받을 때, 기도하는 의인의 기도에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답답한 마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하박국이 보기에 세상은 강포하고 패역하며 죄악이 가득한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해도 하나님은 악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더욱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항변할 때 하나님께서 깜짝 놀랄 대답을 하십니다. 바로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심판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박국에게 응답하신 것인데 하박국의 입장에서 또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인데 바벨론은 하박국이 말했던 유다의 악인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유다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했는데, 바벨론이 쳐들어오면 악인이건 의인이건 모두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악인을 사용하시는가?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항변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그런데 아삽과 하박국의 마음이 같습니다.
아삽이 보기에는 악인들이 너무 형통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이다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아삽이 보았던 불합리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부정하게 불의하게 살 수 없습니다. 죄악을 멀리 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하다보니 편법과 부정으로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나? 나도 그냥 그들처럼 살아볼까? 나도 조금더 비겁하게 조금더 실리있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뇌물도 좀 쓰고 타협하면서 좀 살면 편할텐데, 그리고 경제적인 이득도 있을 것이고, 그럼 가족들이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느 개그맨의 부모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아들의 기도제목을 이야기하시면서 이런 어려움을 말씀하셨습니다. 연예인들 중에 크리스챤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 믿음으로 결정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 진다고 합니다. 광고 섭외가 들어오면 크리스챤으로서 할 수 있다 없다를 잘 구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 광고나 막 찍어대는 크리스챤 연예인도 있습니다. 영화를 찍어도 한 씬 한 씬 세밀히 살펴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배역은 맡지 않는 사람이 있는반면 아무 배역이나 맡아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광고수익이나 영화, 드라마의 배역을 맡으면 경제적인 수익이 어마어마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그 경제적 이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의 결정을 하고 난 후, 다가오는 경제적 어려움, 주목받지 못하는 어려움, 출연하지 못함으로 오는 불안감 등이 많다고 합니다. 분명 하나님 앞에 명분은 가졌지만 너무 허무해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많이 흔들리니까 꼭 기도해 주세요 라고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예!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 앞에 명분을 가졌는데, 때론 현재 상황 때문에 허무해 하고 힘들어 하는 것, 아삽이나 하박국이나 지금 우리나 모두 같습니다. 아삽은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이해해 보고 참아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심한 고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같은 16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과 항변은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공감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공감이 안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잘못된 것인가요?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고 항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항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보시면 하박국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악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악인과 의인을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심판을 게획하시고 뜻하시는 분이십니다. 고통받는 의인들을 외면치 않으시며 구원의 계획을 만세 전부터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12절의 요점은 갈대아 사람들이 스스로 강성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회초리를 들 때가 있죠? 요즘은 안 그런가요? 가정폭력이 됩니까? 사랑이 결핍된 폭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담은 회초리를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초점은 아이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바른 아이로 성장하도록 회초리를 드는 것이죠. 회초리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민족이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바벨론을 회초리로 사용하는 것 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면서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다"고 합니다. 눈이 정결하다는 말은 '정확하다'는 말입니다. 악인과 의인을 분명히 아시며 악과 패역을 분명히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것을 잠잠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렇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성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고백과 완전 일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찌보면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정말 잘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하박국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사람이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급해 하고 답답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121:3~4)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합시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가던 때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입니다. 말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하는 사람들,이들을 지켜보는 신부의 고뇌와 회의 --- 이런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비끌어 매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는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침묵 속에 진짜가 드러납니다. 엔도 슈사큐의 '침묵'처럼 일본이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할 때, 주님이 그 곳에 계시지 않았을까요? 분명 주님은 그 순교의 자리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고 계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실 때, 분명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안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없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주목하고 계시며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면서 스데반 집사님을 그 영화로운 자리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두 팔벌려 자신을 맞이하는 예수님과 천국의 모습을 스데반 집사님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침묵은 훈련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걷기까지는 수많은 넘어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이가 넘어진다고 안고 살면 아이가 걸을수 있을까요? 수많은 넘어짐을 통해 아이가 걷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넘어져도 엄마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때마다 걱정되고 다칠까 염려도 되지만 그래도 엄마는 가만히 있습니다. 잡아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침묵은 훈련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아픔도 있고 고민도 많습니다. 이리 저리 쓰러지고 넘어지는 상황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픔과 고민을 모를까요? 그런데 생각대로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도안해요. 항상 다윗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때는 광야와 동굴이었습니다. 다윗이 너무나 괴로워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곳이 광야였고 동굴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침묵이 정말 답답했겠지만 오히려 그 순간에 더욱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훈련의 목적을 발견하고 믿음의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침묵은 때가 있다. 이 부분은 2장 1절부터 3절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룹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늘 정확합니다. 다만 우리가 급할 뿐입니다. 우리가 참지 못하고 불안해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고 우리를 버려둔 시간이 아닙니다. 때를 기다리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에 감추인 인생을 경영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답답해 하고 초초해 합니다. 불안해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외칩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그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침묵이 이해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의 목적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에게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분명히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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