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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룻1:1~22) 본문

구약/룻기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룻1:1~22)

행복으로초대 2020. 7. 23. 23:14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룻1:1~22)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룻기 말씀은 여러분이 익히 아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다 내용을 이야기 하지는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한 가정의 이동경로를 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등장하는 한 가정은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정입니다. 부인 나오미, 두 아들 말론과 기룐, 이렇게 4명의 가족, 그리고 이후에 두 아들이 결혼해서 맞이한 룻과 오르바라는 며느리, 이 가족의 이동경로입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고, 10년이 지난 후, 다시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갈 때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에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그 결정적 차이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갈 때.

엘리멜렉 가족이 모압으로 간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룻기 1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 하였는데"

이들이 모압으로 간 이유와 목적은 '흉년이 들었다'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말일까요? 양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에는 베들레헴에 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엘리멜렉 가정이 모압으로 간 이유와 목적이 양식을 찾아서 떠났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 가정이 정말 양식이 없었을까요?"

 

이 가정이 모압으로 갈 때, 정말 알거지였을까요?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던 가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지역에서 아주 유력한 가정이었습니다. 10년 후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베들레헴 온 성이 떠들썩하게 됩니다. 이름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 돌아오면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습니까? 온 성이 떠들썩 할만큼 유력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 그 때 그들의 상태가 어떠했느냐 하면, 21절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그들은 풍족했습니다. 흉년이 와서 기근이 들었지만 그들은 풍족한 상태였습니다. 넉넉한 상태였습니다. 양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모압으로 갔을까요?

표면적으로는 흉년이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흉년이 들어서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니까 좀더 안전한 곳, 흉년을 피해 살만한 곳을 찾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이 가진 양식, 즉 재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년이 들어 재산에 대한 피해를 예상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다가 내린 결정이 베들레헴을 떠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흉년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풍족했습니다. 흉년이라는 문제가 다가오니 잃어버린 것은 별로 없는데도 걱정하고 염려함으로 하나님의 땅을 쉽게 떠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껏 그렇게 찾아간 곳이 이방땅 모압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땅에 가서 살 수도 있죠?

네. 살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땅에 흡수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흡수되었습니다.

어디서 알수 있느냐하면 두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둘 다 모압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성경에는 모압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압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다른 신을 섬기는 여인과 어찌 한 멍에를 맬 수 있겠습니까?

 

결국 엘리멜렉 가정이 믿음이 없는 불신앙의 가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사기 1장 1절을 보십시오.

엘리멜렉 가정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사할 때, 그 때가 언제입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사사시대에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한 가정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땅을 떠나서라도, 하나님을 버려서라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서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동은 믿음 없는 불신앙입니다.

 

그럼 믿음없는 불신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모압에서 10년 동안 살았습니다.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풍족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갔던 모압에서 이 가정이 잘 되었나요?

남편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 마저 죽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세 남자의 죽음을 겪으면서 풍족했던 재산도 다 날렸을 겁니다.

파산한 집에 과부 3명이 남았습니다. 너무나 기구한 인생입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흉년보다 더 심한 일을 모압에 가서 겪게 됩니다. 10년 동안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가 이 가정, 과부 3명이 남은 이 가정에 정말 중요한 때입니다.

나오미와 룻, 오르바에게 정말 중요한 순간입니다. 과부 3명이 고난을 겪을 때,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축복입니까?" "고난이 유익입니까?"

여론조사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고난이 유익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주십시오.

아니다 고난은 유익도 축복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 손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축복인지 유익이지 아닌지 난 도대체 모르겠다 손 들어주십시오.

 

고난이 축복이고 유익이라면, 저는 오늘 여러분을 위해 마음껏 고난을 부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던 사업 다 망하는 고난, 건강하던 몸이 갑자기 이상증세가 나타나 병원에 가보니 암덩어리가 생기는 고통.

나오미가 겪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남편이 아들들이 죽는 고통. 지금 거제 전체가 원룸 사태가 벌어졌는데,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쏟아 부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싫으시죠?

 

고난을 겪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자체는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될수 있다는 말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고난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고난과 축복 사이에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시편 119편 71절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그 자체만으로는 축복이 아니고 유익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이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은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될 때에 축복이며 유익이 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고 환란을 겪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고통과 고난의 때에, 하나님~ 이 고난을 통해 내게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합니까? 하나님께 답을 구하고 그것을 알아낼 때에 고난이 축복이며, 유익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당사자는 나오미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믿고 따랐던 남편이 죽었습니다.

설상가상 두 아들 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의 죽음은 룻과 오르바 두 며느리에게도 너무나 큰 아픔입니다.  

 

이 때, 이 3과부에게 닥친 고난이 축복이 되려면, 세 과부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 왔습니까?

그러면서 자신들의 불신앙적인 결정, 믿음을 따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땅, 하나님을 버리면서까지 세상 풍족함을 지키려했던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남편이 모압으로 가자라고 할 때, "안되요~흉년이 와도 우리가 이방땅이 아니라 이 땅 하나님의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죠!"라고 왜 강하게 말하지 못하고 반대하지 못했는지,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왜 남편이 죽고 사랑하는 두 아들이 죽었을까? 하나님께 답을 얻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이 축복이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난이 올 때, 계속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답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2.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나오미는 어땠을까요?

13절 후반 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20절입니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이 말만 생각해 보면 나오미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나를 치시고 왜 나를 괴롭게 합니까?"

그런데 이 말은 원망이나 불평의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21절 말씀을 정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내가 모압으로 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는데, 그 곳에 고난을 겪고 환란을 겪고 감당하기 힘든 너무나도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 곳에서 나는 빈손이 되었는데 빈 손된 나를 여호와께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나오미가 스스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압으로 갈 때는 자기들 마음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오미는 만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잡아야 합니다.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의 뜻이 무엇일까요? '떡집'입니다. 베들레헴에 떡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찾아갔던 떡, 양식이 실제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과 모압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냐하면 6절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단 함을 듣고"

베들레헴과 모압의 결정적 차이는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그 돌보심을 뿌리치고 모압으로 떠났던 나오미를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베들레헴 땅에 임한 기쁜 소식을 듣게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은혜를 구하게 하십니다. 그녀의 발걸음을 이끌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 진짜 떡, 진정한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나오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에게 고난은 유익이 되었습니다. 10년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회복을 기대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눈물많이 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성도들마다 얼마나 사연도 많고 눈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은지 모릅니다. 누구에게 속 시원히 말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거리면서 잠을 못이루고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압으로 떠날 때에 혹시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믿음없이 살았던 나의 모습,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믿음 가지고 돌아옵시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멋대로 멀리 가버린 나! 그러다가 빈 손된 나! 이제는 하나님께로 믿음 가지고 돌아옵시다. 믿음 가지고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의 고백으로 견디고 인내하고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떡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리해 볼까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갈 때는 믿음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의 고난을 겪으면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나오미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겉으로는 빈 손이지만, 그 손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믿음이 들려있습니다. 거기다가 나오미 혼자가 아닙니다. 룻도 있습니다. 나오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룻의 유명한 고백이죠.

 

16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오미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진짜 빈손입니다. 풍족하게 나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데 아무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며느리 두 사람이 반응이 나뉘어 집니다.

 

룻이나 오르바나 너무나 착한 며느리들입니다. 이런 착한 며느리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결혼 안한 아들 두고 계신 성도 여러분! 이런 착한 며느리 얻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르바가 욕을 많이 얻어먹지만 아니에요. 오르바도 얼마나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오르바와 룻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오르바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고백을 할 수없는 며느리. 반면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고백을 합니다. 오르바가 친정으로 돌아가는데 그 일에 대해서 나오미는 오르바가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신앙고백, 믿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남편 죽고 두 아들 죽고 다 잃어버리고 빈손, 한마디로 거지꼴이 된 시어머니 보면서 뭐가 부럽습니까?

상상하기도 싫죠?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뭘라고 합니까?

그 모든 고난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런 하나님 믿고 싶을까요? 제 정신으로는 못하죠?

 

성령님이 룻의 마음을 헤까닥 해야지만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시어머니의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의 시절을 참고 견디며 사는 시어미니 나오미. 이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지 라는 감동을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끝까지 내 인생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보리라."

어머니에게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올 때, 나오미도 믿음이 있고, 룻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난중에도 끝까지 견디며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아멘!

여기서 끝~!! 하면 ~~~~힘들어집니다.

 

언제 끝나는지 아는 고난은 힘들지 않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이 진짜 힘듭니다.

그래서 고난의 끝,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기뻐하며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까요? 22절입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두 사람이 돌아오는데, 그 때가 언제죠?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보리 추수가 시작됩니다.

 

모압으로 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는데,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빈손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빈손이에요. 아무 것도 없이 몸뚱아리만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빈손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돌아올 때 믿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거에요.

믿음을 가지고 돌아오니까 나오미와 룻의 믿음의 손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느냐하면 '보리추수의 때'를 주십니다.

 

이 보리 추수의 때를 통해 나오미와 룻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3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룻이 새 남편을 만납니다. 그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기업무를 자.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빈손까지 채워줍니다. 보리 추수하는 풍족한 때, 여섯번 되어 눌러 풍족하게 나오미를 채워줍니다.

룻은 어떨까요? 보리 추수할 때 이삭을 주으러 나갔다가 남편될 사람을 만납니다. 그것이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이 아니라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만남이요. 예수님의 족보가 되는 만남입니다. 놀라운 영적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줄기가 되는 만남입니다. 이렇게 보리 추수시작할 때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믿음의 손에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렇게 외칩시다. "하나님~고단한 내 인생에 보리추수의 때를 주소서! 보리 추수의 때를 주소서! 보리 추수의 때를 시작해 주소서!"

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 받을 때가 이때라 지금 주께 나아와 겸손하게 아뢰라 구원함을 얻으리 얻으리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