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욥20:1~11) 본문
2021년 2월 14일 새벽기도
1.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마음 모아 찬양하겠습니다.
찬송가 425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 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행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아멘.
2.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3.하나님 말씀은 욥기 20:1~11입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의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욥과 그의 세 친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계속 됩니다. 이번에는 나아마 사람 소발 차례입니다.
소발의 말도 요점은 다른 친구들과 같습니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인과응보'다.
욥이 죄를 지은 악인이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심판으로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4절에서 11절까지를 보시면 욥과 같은 악인은 비참한 최후를 당할 것이라고 저주를 합니다.
어떻게 저주를 했을까요?
악인의 자랑과 즐거움, 존귀함 그 모든 것이 꿈같이, 환상처럼 잠깐이고 똥같은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할만큼 망할 것이다.
주일 새벽마다 욥기서를 보지만 계속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맞을지 몰라도,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인과응보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욥이 죄인, 악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욥의 세 친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펼칠 뿐입니다. 그런데 욥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니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욥을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위로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격하고 저주하기에 바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입니다. 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불쌍한 처지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비난하고 저주할까요? 명색히 친구라고 하면서 어떻게 욥에게 이리도 매정할 수 있을까요?
눈을 막고 귀를 막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첫째, 감정입니다.
소발이 하는 말 속에 소발의 현재 감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 '초조한 마음이', '내 중심이 조급하다' 3절에도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 등의 말입니다.
격렬한 논쟁 중에 욥이 세 친구들을 향해 "너희들이 정말 무자비하다. 어떻게 그렇게 정죄만 하느냐, 나는 무고하다. 너희들의 잘못된 정죄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지 모른다. "고 했는데 그런 말을 듣고 소발의 마음 속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욥에게 말을 하는 동안 속에서 분노의 말이 터져나오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고 조급하고 욥의 말에 나를 부끄럽게 해~니가 나를 모욕해~~라는 강한 분노가 쌓인 것입니다.
매우 흥분하게 되었고, 강한 비난을 쏟아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감정이 결국 욥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귀를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둘째. 자기 생각입니다.
2절 3절에는 소발이 말하지만 소발이 대답하게 하는 것은 내 마음, 내 중심, 내 슬기로운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소발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근거는 자기의 마음, 자기 중심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슬기로운 마음'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오만한 마음이 귀를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자기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은 무조건 맞다~! 자신의 생각이 마치 진리인양 행동하는
오만함이 보입니다. 자기 생각과 주관에 매여 모든 것을 판단하는 소발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로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소통이 안되죠. 자기 생각만 주장하는 사람은
결국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막고 귀를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셋째. 세상의 이론과 전통
소발의 말 중에서 소발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세번째 장애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절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사람들이 사상과 이론, 신학, 전통, 경험, 유전, 법칙 등의 장애물
때문에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발은 인과응보론을 맹신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국 공의와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일어나게 하는 목적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잘못을 범한 것은 그들이 무식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이론과 전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심지어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유전을 절대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눈을 막과 귀를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에 의지하여" 고기잡던 베드로가 했던 말을 기억합시다. 자신의 감정, 지식, 경험, 사상을 다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하는 삶'을 앞세웁시다. 내 생각에는~~~이 말을 그만하고, 라떼는 말이야~~~
세상의 사상과 이론, 신학과 전통, 경험과 법칙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의 목적은 베드로가 물고기 더 많이 잡아 부자되는 인생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말씀에 의지하고 더 말씀을 앞세웁시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의 모든 기준이 말씀에 의지하여 삽시다.
4.기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듣고 보고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악한 감정, 나의 교만한 생각, 세상에서 듣고 보고 배우면서 내 안에 굳어버린 세상의 것들이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눈을 막고 내 귀를 막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삶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주일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코로나는 잠잠해 지고 막혔던 모든 예배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옵소서.
예배의 모든 순간마다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아래 온 성도들이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담임목사님에게 성령의 충만함과 기름부으심, 말씀의 감동을 주시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선포되는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며 살아가고, 날마다 말씀이 삶 속에 이루어지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잃은 가족 찾기 전도세미나가 계속 진행중에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하나되지 못한 가정마다 구원의 큰 은혜를 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주시옵소서. 세미나를 진행하시는 박복남 장로님과 함께 하여 주시고 전도의 걸음마다 동행해 주시고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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