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누가복음 15:3-7 한 영혼 본문
누가복음 15:3-7 한 영혼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3-7)
가끔씩 잃은 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습니다.
볼 때마다 눈시울을 적시면서 시청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어릴 때, 이산가족찾기를 하루 종일 시청하면서
얼마나 눈시울을 붉혔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TV에서 눈을 뗄 수 없이 보고 또 보며 울었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감격적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이런 아픔이, 또 이런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백 마리 양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어디론가 달아나서 잃어버렸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 산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잃어버린 양을 찾았고, 그 양을 덥석 껴안고
목에 걸고 집에 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고 온 동네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열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크게 기뻐하신다"
여기서 아픔과 기쁨을 보셔야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에서는 목자의 아픔과 기쁨도 있고
한 마리의 양의 아픔과 기쁨도 있습니다.
목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생긴 단절이 하나님께도 얼마나 큰 고통이고
또 하나님을 떠나 먼 길에서 외롭게 떨고 있는 양떼에게도
얼마나 큰 비극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1.세상에는 무가치한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가치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돈을 가졌느냐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 눈앞에서는 그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냐에 의해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 사람의 신분이 외견적으로 얼마나 높은가에 의해서 판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그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사회적인 신분이 얼마나 높은가? 얼마나 멋지게 생겼는가?
얼마나 인간적인 매력을 가졌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앞에는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처음에는 그 말씀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들만 들어야 될 말씀을
저 죄인과 세리들이 같이 듣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불평합니다.
"당신은 상종 못할 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는가?"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조건 따라서
사람을 멸시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주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난 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사람이 겉모습만 보고 평가해 큰 실수를 했던 사연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한 거부(巨富)가 마음에 결심을 하고 하버드대학 총장을 만나기로 작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생애에 많은 부를 모았는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세상 떠날 것이므로
그 재산을 가장 값어치 있게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버드대학의 건물이 많이 낡았기에
학교 건물을 멋지고 아름답게 지어 주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총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아주 검약한 분이어서 초라한 옷을 입고 갔습니다.
찾아온 그 분에게 교무처장이 그러셨나 봐요.
"뭐하러 오셨습니까?" "총장님 뵈러 왔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구요?"
조금만 이야기를 하겠다고 아무리 요청해도 이 분의 외모가 신통치 않으니까
교무처장이 "우리 총장님이 바쁩니다"라고 하면서
쌀쌀맞게 거절하고 내몰았습니다.
이 분이 그 학교를 나오면서
'그래, 동부에는 좋은 학교가 많지.
그렇다면 서부에도 좋은 학교 하나를 세우자.'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학교가 스탠포드대학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교무처장이 겉모습만 보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돈을 가졌든, 돈이 없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젊고 생생한지, 늙어서 힘이 없는지를
판단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실패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내 나이는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
그래서 나는 별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내가 약하다고요? 아닙니다. 약하기 때문에 더 소중합니다.
저는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막내 동생은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부자유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놀림의 대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모님에게는 눈을 감을 때도 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마치 다른 여덟 명의 자식은 없는 것처럼
막내 동생 이름만 부르시더라구요.
우리 하나님에게 무가치한 인생이 없습니다.
나는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내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귀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시편 23편을 들으며 우리는 시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감동하지만,
이 시를 마주 대할 때마다 몸 전체가 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자기들이 유목민족으로 목자가 얼마나 양떼를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목민족의 찬양입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찾으시는 목자, 그 분은 말하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그 분에게 한없이 귀한 가치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가치가 생깁니다.
저는 수석(壽石)을 잘 모으지 않는데,
돌멩이를 모아놓고 좋다고 가치를 느끼는 사람은 한없이 좋아하더라구요.
제가 수석을 안 모으는 이유는 제 머리가 돌인데, 또 돌을 모으기가 싫어서요.
제가 공부를 잘 해본 경험이 없거든요. 공부 못하는 자녀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저 같은 놈도 그래도 좀 쓸데가 있지 않아요? 제 머리가 돌입니다.
그래서 돌 모으는 것, 안 합니다. 제 머리만 들고 다녀도 힘든데요.
그런데 그 돌에 가치를 부여하니까 죽고 못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국만 가면 꼭 돌 사러 다니고 시냇가에 가서도 돌만 쳐다봅니다.
사랑을 하면 가치가 생깁니다. 저는 다이아몬드가 좋은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다이아몬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관에 박혀있는 보석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반짝거리는 돌멩이 큰 것 하나 있구나 하고 지나갔어요.
우리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내가 그 분의 양떼라면 그 분에게 무가치한 양떼는 없습니다. 도망갔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합니다. 목자는 있는 양을 소중하게 여길 뿐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향해 어떤 노력도 불사하고 찾아 나섭니다.
찾아가는 이 목자에게는 없는 것이 다섯 개가 있습니다.
첫째로 기쁨이 없습니다. 나중에 찾아야 기뻐합니다.
그리고 주저함이 없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물이 있는지, 돌짝 밭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주저함 없이 찾고 찾고 또 찾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분노가 없습니다.
'내가 그처럼 보호하고 그처럼 사랑했는데도 내 보호와 사랑을 떠나서 도망가?
이 괘씸한 것!' 하고 분노가 치밀어 볼만 하지만 분노가 없습니다.
자식이 집 나가면 전에는 몹시 서운하지만 "돌아오기만 해준다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그런가하면 피로가 없습니다.
그렇게 찾았어도 찾아지지 않으니까
피곤해서 무너져야 될텐데 양떼의 모습을 볼 때까지는 피곤함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추적합니다.
그런가하면 이 목자가 가진 것 있습니다.
슬픔을 갖습니다. '어린 양떼가 나를 떠나서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가?'
하는 걱정으로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찹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근심, 걱정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인내가 있습니다. 계속 견디고 계속 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덥석 껴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깨에 맨다고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기쁨의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 찾는 기쁨 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 보다
한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찾으면 기쁨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찾으신 바가 되지 못한 심령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나오면 주께서 영접해주십니다.
하늘에 큰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또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천국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중단할 수 없는 기쁨의 함성이 터질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내 잃은 아들을 찾았고 죽었던 자식을 다시 얻었다. 이로써 기뻐하고 기뻐하자."
이 천국의 잔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잃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때 내가 갖는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 예수 믿을 때의 감격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첫 사랑이 회복되는 것은 쉽습니다.
주님 앞으로 인도해서 그 분이 예수 믿는 모습을 볼 때,
주님을 처음 믿었던 감격이 뭉게 구름이 피어나듯이 가슴속에 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감격을 잃은 형제, 자매들이여.
너무 옛날에 믿었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이 소실된 여러분이여.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그 때 천국에서는 큰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쁨을 혼자 다 누리지 않으시고
그 영혼을 우리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는 심령들에게도
즉석 보너스로 천국의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한 영혼이 돌아올 때, 마치 이전에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던 것처럼 기뻐하시는 우리 주님입니다.
그 기쁨이 충만할 때 우리 영혼도 더 충만해집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아직도 나는 하나님께 찾은 바 되지 못했다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다면
그 크신 주님의 사랑 앞에 몸을 던지십시오.
그 분은 아직도 사랑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실망시키고 배반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이 은혜가 성령으로 역사하는 아름다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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