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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누가복음 10:25~37 긍휼의 사람 본문

신약/누가복음

누가복음 10:25~37 긍휼의 사람

행복으로초대 2023. 8. 17. 15:50

누가복음 10:25~37 긍휼의 사람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 곳을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죽게 되어 신음하는 자를 외면하고 가버렸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도 긍휼을 베풀지 않고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들 마음속에도 어떤 동정심이나,
참으로 안됐구나 하는 불쌍한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정심은 결코 긍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긍휼은 하나의 감상이 아니라 행동이요 삶입니다.
조금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볼 때 부정하게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자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도움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1033절에서 35절을 보면
“...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측은히 여기는 감정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이기심과 정반대입니다.

긍휼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더 중요시하고,

자기 자신의 슬픔보다도 다른 사람의 슬픔에 더 민감한 태도를 가집니다.

긍휼은 마음을 움직이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손을 움직여 궁핍한 자를 돕게 합니다.

긍휼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든지 베풀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신분이 누구며,

어느 민족이며, 어느 지방 사람인지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절대 도움이 필요한

그 자체를 보고 행동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기에 앞서서 당장 죽게 된 그 형편이 더 중요했습니다.

또한 긍휼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는 바쁜 여행의 일정에서도 시간과 돈과 사랑을 다 쏟아 긍휼을 보여주었습니다.

혹시 비용이 더 들면 그것까지도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100년 전에 장래가 촉망되던 미국의 젊은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왜 풍요로운 미국땅을 버리고

한국까지 와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과 생명의 길을 모르고,

참진리를 모르고,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의 사람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조선에 온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복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이 한국땅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홀트 여사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버려진 많은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마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외국에 입양시키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새 삶을 살게 하는

홀트 아동복지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복지회를 통해 많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튼튼하게 자라났습니다.

이렇게 귀한 생명의 역사가 바로 긍휼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긍휼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자질 가운데 특별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죄인들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됩니다.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을 나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을 무척이나 켜고 싶어하던 애니라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벼르고 벼르다가 아빠에게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애니의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몇 년 째 흉년이 들어 도저희 바이올린을 사줄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애니의 아버지는 하나님 제가 지금 우리 딸아이에게

바이올린을 사줄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좋은 때에 우리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사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고

렇게 기도하는 아빠의 모습과 기도소리를 애니는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괜히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해서 아빠 마음을 아프게 했구나!

라고 후회했습니다.

 

그 후에 아버지는 이 일과는 무관하게 친구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딸아이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지 못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있습니다.

그리고 한 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애니의 식구들은 그 편지를 받은

아빠의 친구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친구는 애니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바이올린은 벼룩시장에서 산 7달러 자리라고 말하면서

애니의 아버지가 7달러에 그것을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애니는 꿈에 그리던 바이올린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지나 중년부인이 된 애니 부인은

우연히 딸아이에게 줄 싼 바이올린을 구함아라는 광고를 보고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사주지 못해서 가슴 아파 했던 아버지와

비싼 바이올린을 단돈 7달러에 판 아저씨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바이올린을

꺼내 광고의 주인공에게 다시 7달러에 팔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심는 대로 거두는 대원리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반드시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긍휼의 씨를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긍휼의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시편 1825절에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라고 했고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 했을 때,

프랑스의 어느 항공회사의 한 조종사가

자신의 조국 폴란드에 전쟁이 발발하것이라는 것을 듣고

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로 했습니다.

폴란드로 돌아가는 길에 나치의 치하에 들어있는

오스트리아의 한 호텔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독일 비밀경찰에게 쫒기어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한 유대인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 나치의 치하에서 유대인을 구해준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고민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를 숨겨주고 해외로 탈출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국으로 돌아가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몰던 전투기가 격추 당하여

영국에 불시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머리 부분에 큰 부상을 당하여 입원하였지만

영국 전역에 그를 수술할 만한 군의관의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박한 시간이 다가오자 공군본부에서 한 민간인 의사를 보내어

그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의사는 폴란드 조종사가 오스트리아에서 구해준

바로 그 유대인 젊은이였습니다.

 

그 유대인은 폴란드 전투기 비행 중대 소식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의 한 전투기 조종사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수술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유대인은 자기가 받은 폴란드 조종사의 긍휼을 생각하고

자기가 수술하겠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받아야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작정 수술장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술장에 누워있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을 구해주었던 폴란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왕이 태어나는 히브리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긍휼이 여겼습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왕에게는 히브리 여자들은 애굽여자와 달리 건강하여

아이를 받으러 가면 이미 아이를 낳아 죽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긴 산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1:20~21을 보면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긍휼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때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