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부르심4일 출애굽기3:1-12 모세야 모세야1 본문
부르심4일 출애굽기3:1-12 모세야 모세야1
부흥기도주간 부르심 4일차.
오늘의 부르심은 모세야 모세야 입니다.
이 시간 새벽기도와 오늘 저녁 금요심야기도회 두번에 걸쳐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를 부르셨듯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모세야~모세야~부르실 때,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인생이 빛납니다.
모세의 인생은 총 3기로 나눠집니다.
1기는 태어나서 40세까지 애굽 왕자로서의 삶(40년)
2기는 80세까지 험난한 광야의 삶(40년)
3기는 120세까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삶(40년)
이 중에서 2기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40년을 세월을 보낸 모세를
드디어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모세는 '잊혀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애굽에서 상당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태어나면서 강에 버려진 히브리 아기임을 모두가 알고 있고,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왕궁에서 자랐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권력구조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나마 궁중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사는 ‘somebody’ 였지만
이제는 살인자,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nobody’되어 버렸습니다.
모세의 40년 광야, 잊혀진 세월, 잊혀진 사람으로 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을겁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살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이죠.
내가 지금 이 광야에서 양이나 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광야에서 스스로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 조차도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모세의 가장 비참함을 드러내는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 3장 1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40년이나 미디안광야에서 양을 쳤는데,
아직도 ‘자기 양’이 아니라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내면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아직도 그 회사에서 그 자리 밖에,
아직도 자기 집이 아니고 전세로,
아직도 취직도 못하고 취준생으로, 아직도 자식이 그 모양이야,
아직도 결혼도 못하고... 저도 얼마전까지 그런 말을 종종 들었는데,
아직도 그 교회에서 부목사로... ”
기억할 것도 없고, 누구도 알아 줄 것도 없는 인생,
그래서 투명인간 같은 존재로 ‘잊혀진 광야’에 있는 인생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고,
그렇게 보는듯 해서 사람들 시선이 신경쓰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더 집중해 주십시오.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영주시민교회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죠?
이 말을 하면 벌금1만원이라고 했습니다.
뿌리뽑아야 하고 이제부터 사라져야 할 말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 이후로' 였습니다.
하나 더 추가합니다. 이 생각을 뽑아버리려고 합니다.
영주를 벗어나면 성공, 영주를 벗어나지 못하면 실패.
이 생각이 어른 성도들에게서 은근히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니까
중고등부, 대청부 청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영주에 와서 살아보니 사실 불편합니다. 예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 불편할 뿐입니다.
교역자 모시기가 정말 힘듭니다.
영주라고 하니까 안 옵니다.
사실 담임목사로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영주라고 하니, 영주로 들어오기가 어려운데,
영주에 사는 아이들, 청년들이 얼마나
영주를 벗어나고 싶을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 지역에 사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상황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대청부 청년들과 중국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자기 소개를 해 보라고 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고
그 말이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는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고 이렇게 말한 후,
꼭 이 말을 하더라구요.
"영주에는 언제까지 있을 예정입니다."
이 말이 제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어른들의 생각과 말에도 청년들이 영주를 벗어나면
뛰어나고 탁월한 청년으로 보고,
영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영주에 살면,
그저그런 청년으로 보는 인식이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과 말을 지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영주시민교회 대청부 청년들
격려 많이 해주십시오.
대청부 청년들 4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 청년들의 마음 속에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교회를 얼마나 아끼는지
교회를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힘든 상황을 견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목요일 저녁, 엘림에서 대청부 청년 4명이 계속해서
기도회 모임을 하고 있는 것 아십니까?
교회를 위해, 목회자들을 위해, 그리고 새로 부임할
담임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오고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그루터기 같은 귀한 청년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이 곳 영주에서
영주시민교회에서의 빛나는 삶을 사는 청년들이
여기 살아있구나~정말 기뻤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지는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제 한 청년이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고
"목사님~강력한 심방을 해주십시오."라며 심방을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그 청년에게 심방을 갔습니다.
매일 밤마다 홀로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며 큐티를 하고
자기가 잘 하는 분야에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주주운동의 말씀에 순종을 하면서,
목사님~저도 목사님처럼
섬김을 위한 마르지 않은 샘 봉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보자고 하니,
정말 봉투에 섬김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쓴 봉투를 보여주더라구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이잖아요.
그래서 그 청년이 만든 섬김샘 봉투에 씨앗이 되라고
10만원 넣어주었습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구하고 있고
말씀 한 구절 놓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내려는 청년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환경,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것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의 핵심입니다.
영주시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영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고
영주시민교회 성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입니까?
영주에 살고 계시면 그냥 그럭저럭 살지 마십시오.
내가 왜 영주에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내십시오.
수영로교회 장로님 vs 개척교회 장로님. 자기소개.
한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장면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2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모세가 양을 치다 희귀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오는 불꽃 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떨기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NIV 성경에는 ‘bush’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덤불’쯤 되는 말입니다.
나무가 아니라 덤불 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장면은
그렇게 장엄한 모습이 아닙니다.
옛날 영화, 십계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영화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떨기나무 이 장면이
상당히 멋진 장면이 머리 속에 있습니다.
그 위엄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훨씬 더 멋있지 않을까요?
우리 교회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 처럼
커다란 나무가 활활 타오르는데
타는데 타들어가지 않는 나무,
굉장한 장면을 생각하신다면 오해입니다.
나무가 아니라 사실은 덤불입니다.
미디안광야에 있는 가시덤불은
아무리 커도 1m를 넘지 않는 크기입니다.
모세의 초라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부르심 역시 초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더듬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장면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대 회심사건이 있습니다.
1)어거스틴은 그저 정원을 거닐다가
‘성경을 읽어라’라는 음성을 듣고 서재에 들어가
펼쳐진 성경을 읽다가 말씀 앞에 거꾸러지는 체험을 합니다.
2)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젊은 수도사시절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작은 그의 연구실이 있었던 탑에서 회심했습니다.
3)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는
길을 걷다가 작은 모임에서 들려오는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듣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초라한 곳에 초라하게 찾아오신 하나님!
1904년 웨일즈에 있었던 부흥운동은 당시 수개월 만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영적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이 부흥 운동의 주역은 이반 로버츠라는 청년이었고
어느 수요일 저녁 17명이 모인 작은 수요일 집회에서
설교하다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기도에 헌신하며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광야에서
살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또한
세상이 기대하는 거창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안그래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부르심을 받을 때는 정말 초라한데,
하나님의 임재 또한 눈에 보기에 초라하다고 하니,
실망이 되실 수 있겠죠?
그런데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셔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은 거창하거나
위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둡고 냄새나고 비천하였지만
예수님의 탄생하심으로 들판에 있는 목자들에게는
주의 영광이 빛이 비치고
천사들의 찬송이 울려퍼졌음을 기억하십시오.
모세는 초라했고,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임재 또한 초라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순간,
고통받음으로 부르짖던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빛이
비치고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초라해도 됩니다.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을 통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응답하라 2024! 할렐루야!. 아멘.
'구약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애굽기 4:1~17 회복2-믿음의 눈으로 변한다 (0) | 2024.01.12 |
---|---|
부르심5일 출애굽기3:1-12 모세야 모세야2 (2) | 2023.12.29 |
출애굽기 23장 14~19절 세가지 감사2-첫열매로 감사하라 (0) | 2023.07.09 |
출애굽기 2장 1-10절 위대한 어머니, 요게벳(MIP기도하는 엄마들 세미나) (1) | 2023.01.03 |
출20:13-15 십계명 6-8계명 (0) | 202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