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다니엘 3:13-18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람들 본문
올해 2024년 파리 올림픽의 개막식에서
여장을 한 남자들, 트랜스젠더들이 나와서 공연을 하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조롱하는 패러디를 하면서
기독교를 조롱했습니다.
개막식 뿐만 아닙니다.
올림픽 경기 중, 유도 세계 챔피언인 세르비아 선수
네마냐 마이도프(28세)가 경기장에 입장할 때
십자가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5개월간 ‘출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은 개막식 때 환호를 받지만,
예수님을 높이는 신앙은 자격 정지를
받는 모습,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런 반기독교적 물결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시대에서,
가장 강력하게 세상과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동성애' 와 '포괄적 차별 금지법'입니다.
미국의 뉴욕주는 성을 구분할 때,
공식적으로 31개의 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란 남자, 여자를 말하는 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성은 남자와 여자, 2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31개의 성이 있다고 하면서
매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여자가 되고 오후에는 남자가 된다고 하고,
자신은 남자와 여자 모두 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 어느 성도 아닌 제3의 성이라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남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되기도 합니다.
남자가 자신은 여자라고 하면서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데도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안그래도 저출산 문제 때문에 군입대할 군인이 없는데,
남자들이 자신은 여자라고 하면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는 이런 혼란에 대해서 가정의 부모도, 학교의 선생님도,
교회의 목사님도 이런 문제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괄적 차별 금지법에 의해 차별을 당했다고 고발하면
구속이나 벌금형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차별? 그건 당연히 금지해야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 조건, 기혼,미혼,별거,이혼,사별,재혼,사실혼 등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 상황, 정치적 의견, 전과,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으로 차별을 당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에는 독소 조항이 있습니다.
당연히 차별받지 말아야 할 조항들 속에 은근슬쩍 끼워넣은 조항이 있는데,
종교, 사상, 그리고 성적 지향, 성정체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종교와 사상에 대한 차별금지로 선교와 전도 활동에 많은 제약을 당하고
이단들에게 이단이라고 하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단들이 교회에서 활동을 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또한 동성애의 문제점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없고,
교회에서 설교할 수도 없습니다. 동성애를 지적하면 혐오표현을 했다고 해서
처벌을 받게 됩니다. 동성애 교사의 채용을 막을 수 없고
동성애 교사임이 드러나도 그 교사가 가르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만 창조하셨고,
동성애에 대해서 악하고 가증하다 하시면서, 반드시 보응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증한 것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에바(תּוֹעֵבַה)',
곧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혹은 금지하신 것이란 뜻”입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바꾸려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지막 대적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면서 동성애에 대해서 강력한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한국도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합법화하려고 특히, 지난 7월 18일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동성 커플에게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이 났는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동성혼 법제화가
초읽기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로 빠르게 치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21세기의 새로운 영적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중심에서 제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광란의 노래를 부를 때 찢겨 가는 하나님의 가슴,
피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를 향해 외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눈에 흐르는 아픔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통한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오늘과 같은 왜곡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우리 다음 세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는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본문은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바벨론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벨론은 지금의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일부 지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했던 대제국입니다.
이 거대한 제국을 완성한 왕이 본문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는 유다까지 멸망시키고 다니엘과 세 친구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들은 포로된 신세였지만 왕의 호의로 평탄한 삶을 삶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고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만든 신상을 세웠습니다.
너비가 거의 3미터, 높이가 거의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우상이었습니다.
왕은 바벨론을 다스리는 관리를 다 불러 모았습니다.
수많은 관리들이 줄을 지어 섰고, 궁중 악사들이 모든 악기를 대동했습니다.
왕의 명령이 들려옵니다. “모두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 던져 죽이리라.”
천지를 울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참석한 모든 사람이
금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만 받으셔야 할 경배를 우상 앞에 드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때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면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핍박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참소했습니다.
12절에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분노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처지에 높은 관직까지 주었는데,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소에 이들의 충정을 잘 알고 있던 왕이 묻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정말 절하지 아니했느냐?
이제라도 음악이 울리거든 절하라, 그리하면 내가 살려주리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가 있겠는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세 사람의 대답은 확고했습니다.
16-17절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 흐름에 맞서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절 한번 한다고 신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이런 질문에, 세 사람은 무엇이라 말할까요?
"우리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타협이란 단어가 사람들에게는 매우 지혜롭게 보입니다.
기독교가 ‘유일’, ‘절대’라는 말을 제거해 버리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종교가 될 것입니다.
남을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겨라.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
이보다 더 고결한 윤리와 철학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왜 기독교가 이 시대에 이렇게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저는 진화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사실을 믿습니다.”
이 위대한 고백 때문에 폭격처럼 비판을 받는 시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 때문에 조롱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타협이라는 안락의자에 앉아
영적인 잠을 잘 때가 아닙니다.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리라고 침묵의 잔을 마실 정도로 평온한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시대를 향해 세상과 타협하는 닻줄을 끊을 때입니다.
적당한 신앙으로 홀로서기 하는 무관심의 강둑을 터뜨릴 때입니다.
오늘과 같은 어두운 영적 시대를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A.W. 토저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세상과 충돌하라』이고,
부제는 “세상과 동행하는가, 성령님과 동행하는가”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편하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 편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세상과 불화하라, 겁먹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
그리스도인들이여, 무릎 꿇고 세상을 흉내 내지 말라!”
그렇습니다. 동성애 세력도, 반기독교 세력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기독교인은 너무나 조용히 지켜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세상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외면당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너무나 소심하게 살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토저 목사님은 침묵이라는 이름에 신앙을 파묻어버리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정신에 맞서라!
세상과 충돌하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비난 받을 용기도 가져야 합니다.
누가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 맞설 것인가?
지금은 영적 위기요, 무너져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경고를 울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나의 구원자로 믿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진실로 복된 나라로 믿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한마음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늘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전혀 다른 현실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온 세상을 통치한 권력자 앞에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당당하게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던 세 친구들의 신앙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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