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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하나님의 뜻이 담긴 죽음(신명기 34:1~12) 본문

구약/신명기

하나님의 뜻이 담긴 죽음(신명기 34:1~12)

행복으로초대 2021. 5. 9. 15:29

하나님의 뜻이 담긴 죽음 (신명기 341~12)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이렇게 해주시면 더 좋지 않은가?

 

오늘 말씀에 보면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바로 전.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40년 광야의 지도자인 모세를 높은 산 꼭대기에 데리고 가셔서

가나안 땅 전체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한발이라도 딛고 싶었던, 만져보고 싶었던 땅 그런데 그 땅을 다 보여주시고 모세에게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아쉽지 않나요? 인간적인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 점수를 매기면 1등이 모세 아닌가요?

 

그래서 모세는 당연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 마땅한데,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때 나이가 120. 건강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건강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7절입니다.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누구입니까?

10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해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1애굽의 온 땅에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 모든 큰 권능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전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모세만큼 탁월한 지도자가 또 있을까요?

 

그리고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너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온갖 불평과 원망, 반역, 수많은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공로가 큰 사람입니다.

 

이런 모세가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민수기 20

신광야에서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물을 주라하시는 명령에 반석을 두 번 내리친 것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석을 두 번 내리친 것에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이 믿음이 없는 행동이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10632-33절에 보면 입술로 망령되이 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망령되이라는 말은 성급하게 자기 마음대로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야 하는데 자기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무덤을 아무도 알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346절을 보시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앞에서 말했듯,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던 더 큰 이유가 오늘 말씀에 있습니다.

모세의 무덤을 아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 홀로 올라갔으며, 거기서 홀로 죽어 묻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의 최후로는 너무나 초라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것에 대해서 신약성경 유다서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모세가 죽은 후,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한 것입니다.

소유권을 주장한 근거는 모세가 애굽인과 히브리 사람을 살해했던 것 때문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세의 시체를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마귀는 모세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시체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려고 합니다. 죽은 시체를 드러내놓고 모세를 하나님 대신 섬기도록, 즉 우상숭배를 하는

죄를 짓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가정이지만, 모세가 죽지 않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가나안 정복을 진두지휘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 순간 모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험의 순간이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모세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할 수 없었던 때입니다. 모세를 마치 하나님처럼 우러러보는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가끔 위대한 업적이나 성과를 낸 사람들이 말년에 오히려 분별력이 사라지고 교만해져 실수하고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대표적인 성경인물로는 다윗과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생각 속에 모세 없는 가나안이 있었을까요?

모세 없는 가나안 정복이 가능했을까요?

 

마귀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모세의 시체라도 가로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아주 큰 무덤을 만들고

모세를 형상화한 각종 우상용품을 만들고 백성들이 섬기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왜 죽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모세의 무덤을 왜 아무도 모르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나만 봐입니다. 하나님만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는 모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모세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있다면 죽음 또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나만 봐!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도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초라한 무덤도 없는데, 그런 무덤 조차도 없이 사라지는 듯 보여도 그의 퇴장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 야고보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 다~~ 세상적으로 초라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헛된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나만 봐!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귀한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일, 아무리 잘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급이 되고 서열이 되고 비교를 하면서 더 잘 섬기는 사람, 나보다 못 섬기는 사람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모든 생각, 나의 뜻은 죽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나는 사라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은 400미터 계주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가 있어도 4명이 연결되어 달리는 계주에서 나머지 세명의 선수가 실력이 떨어지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습니다. 4명의 선수가 실력이 고르게 뛰어나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잘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밀어주고 땡겨주고 마음을 같이해서 함께 상향 평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9절입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모세라고 하는 우사인 볼트같은 비교불가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달려야 할 구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다음은 여호수아입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달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