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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데살로니가전서 2장 6~9절) 본문

신약/데살로니가전서 완료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데살로니가전서 2장 6~9절)

행복으로초대 2017. 11. 29. 18:22

 

"나도 이런 교회에 다니고 싶다"라는 글을 어떤 집사님께서 문자로 보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 미주리(Missouri)주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에 그 날따라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손님들이 하나같이 삭발을 요구했습니다. 미용사는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삭발을 요구한 손님들은 그 마을의 50여명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처음에는 이상한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연을 듣고는 너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교인들로부터 사랑받던 여자 중학생이 암에 걸려 암수술을 하고 항암치료까지 마쳤지만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방을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술과 항암치료로 인해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서 외출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에 돌아와서 성도들과 의논한 끝에 교인들 모두 머리를 깍기로 결정하고 미용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 사연에 감동한 미용사는 방송국에 연락을 했고 그 소녀의 엄마와 목사님의 끈질긴 설득 끝에 교회에 나오기로 한 주일날에 방송국에서는 취재진을 보내 취재를 했습니다.

 

그 소녀가 교회 문을 연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회에 오면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창피했던 소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50여명의 까까머리가 된 교인들이 그 소녀를 뜨겁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까까머리가 아니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중계하던 리포터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쳔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교회를 간다면 이런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점점 차가워지는 세상에 이런 감동의 스토리가 있는 교회가 우리 거제 호산나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입니다.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6~7절 말씀입니다. 원래 6절과 7절은 한 구절입니다. 한글 성경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두 구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6절과 7절을 연결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다. 때문에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해서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영광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도는 권위있는 사람들이고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권위를 내려놓겠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사도는 사도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영광을 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영광을 구하다는 말은 권위를 주장한다는 말이며 성도들에게 짐을 지운다, 폐를 끼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짐은 경제적인 부담입니다.  사도의 권위를 주장함으로 성도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고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권위있는 자가 되어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는 것, 대접을 받는 것, 사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승진하는 것 중요하잖아요. 더 많은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밑에서 굽신굽신 하기 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교회 안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직분을 계급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집사보다는 장로가 높고 집사보다는 권사가 높고 장로, 권사보다는 목사가 높고 목사 중에서도 부목사보다는 담임목사가 높다는 계급으로 생각합니다. 제 외삼촌들은 교회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한번은 명절날 외삼촌들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창태야. 니는 교회에서 뭐하는데?"

 "네! 저 목사입니다."

 "아따 성공했네."

 

계급의 개념을 가지고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교회 안의 성도들 조차 계급의 개념으로 직분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시험들고 관계가 깨지고 어떤 때는 교회가 깨집니다. 교회에서 직분자 선거를 한번 할 때마다 후유증이 심했던 적이 많습니다. 직분얻기를 힘쓰지 마시고 더 섬기려 힘쓰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꼴찌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려고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기에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그럼 권위를 내려놓는 것, 계급개념의 직분의식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와 무슨 상관일까요? 사람들이 남들 위에 서려고 하면 그렇게 얻은 권위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게 되고 판단하게 되며 힘들게 합니다. 상처를 줍니다. 사랑의 돌봄에 힘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직분 정도면, 내가 교회에서 쌓은 공로 정도면 당연히 존경받고 높임받고 대접받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안 좋은 예화지만, 들어주십시오. 어느날 한 장로님이 조금 화가난 상태로 교역자실에 들어오셔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교회 교육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요즘 얘들은 어른을 보면 인사를 안해요! 이거 얘들 예절 교육을 잘 해야됩니다." 알고보니 교회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중고등부 아이들이 탔는데 장로님을 보고 인사를 안한 모양입니다. 솔직히 장로님께는 예! 저희들이 예절교육, 인사교육 제대로 시키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말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은 먼저 인사하면 안되나요? 먼저 말 걸면 안되나요? "얘들아~요즘 공부한다고 힘들지? 힘든 공부하면서 이렇게 교회와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하니까 참 좋네. 고마워!" 이런 격려해 주면 안되나요? 그게 어른 아닌가요?" 왜 목을 꼿꼿하게 해서 아이들이 인사를 하나 안하나 얘들 탓을 합니까? 아이들이 그 분이 장로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문제는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 큰 어른들을 대할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사랑의 돌봄은 권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권위를 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권위를 버리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권위를 세워줍니다.

 

이번에는 좋은 예화를 하나 하겠습니다. 아까 그 장로님과 같은 교회에 또 다른 장로님은 항상 낮은 자세로 삽니다. 사회적으로도 훌륭한 분입니다. 유명한 의사시구요. 그런데도 제 기억속에 그분에 대한 이미지는 겸손입니다. 그 분은 반대로 먼저 인사를 하고 먼저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장로라는 직분을 철저히 섬김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한번은 교회로비에서 저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물론 좋은 실랑이입니다. 교회에서 그 날 인쇄물이 너무 많아 일일이 주보에 다 넣지 못해서 로비에서 제가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엘리베이터를 안타십니다. 계단타는게 건강에 좋다고 계단을 올라오시다가 제가 인쇄물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제걸 뺏아 가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이런 거 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할께요"그러셨습니다.

"장로님! 그런게 어디 있습니까? 이리 주세요. 제가 할께요. 장로님 왜 제 일자리를 뺏습니까?"

"어허, 이런건 우리가 해야죠!" 

"장로님이 이런 거 하시면 안되요."

별거 아닌 실랑이죠. 옆에서 보고 있던 여집사님들이 깔깔깔 웃으면서 보기 좋다고 하시고 솔로몬의 재판을 해주셨습니다. "그럼 반반씩 나눠서 하세요." 결국 장로님과 제가 같이 서서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보며 웃는 거죠. 그 웃음은 존경을 담은 웃음입니다. 권위는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권위를 조금만 내려 놓아도 행복한 웃음이 더욱 커집니다. 사랑의 돌봄은 결국 권위가 아닌 섬김을 선택할 때 나타납니다. 권위의 주장이 아닌 섬김의 웃음이 가득한 거제 호산나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어떤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7절 중반부터입니다.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까? 유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순한 자가 되어"라는 말을 주석에서 찾아보니 해석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더라구요. 하지만 해석이 어떻게 되든 유순한 자가 되면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유순한 자가 되면 유모가 된다고 합니다. 권위를 내려놓고 유순한 자가 되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합니다. 여기서 유모를 한국적인 정서에서의 유모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젖먹이 아기를 둔 엄마라고 바꾸시면 됩니다. 엄마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된다입니다. 젖먹이 아기를 둔 엄마처럼 되어 성도들을 잘 돌보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엄마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엄마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엄마를 생각하면서 권위를 생각하는 분, 경제적인 이득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아기를 키울 때, 젖을 물리면서 "야 너 내 젖 한번 먹을 때마다 천원이야." "아니면 내가 널 잘 키울테니까 나중에 커서 꼭 갚아야 된다."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있을까요? 존경받으려고 하는 엄마, 보상받으려는 엄마가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엄마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엄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따뜻함" "포근함" "안기고 싶음" 이런 것을 느낄 겁니다. 엄마는권위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갓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영적 갓난아기 같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엄마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키울 때 하는 행동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존경받으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권위 내세우는 사람 없습니다. 엄마는 아기처럼 됩니다. 아기를 기르다보면 아기들의 언어로 말을 합니다. 우쭈쭈주 아이고 예
뻐라 아이고 내 새끼 ~~ 아이구 귀여워~~ 이러 잖아요. 밤낮 바뀌고 칭얼대는 아기 때문에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아기를 볼 때마다 기쁘고 사랑스럽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게 엄마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엄마들이 뉴스에 한번씩 나오는데 그건 비정상적인 엄마, 문제가 있는 엄마죠. 유순한다는 말은 엄마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순하다는 말 속에 숨겨진 의미가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오래 참는다는 말입니다. 실수를 해도 부족해도 오래 참아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포용하고 이해해 준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아직 어리니까 아직 부족하니까 이해해주고 포용해주고 참아주고 자신을 낮춰 같은 눈높이로 바라봐 주는 것이 유순한 엄마의 자세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제 큰 딸 하영이가 어릴 때 가장 싫어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뭘까요? 아빠하고 공부하는 거였습니다.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하영이를 공부시킨게 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고로 와이프 운전가르치기, 자녀 공부시키기는 결말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정말 잘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습니다. 밤마다 하영이를 붙잡고 이렇게 합니다. "니가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문제를 풀다보면 당연히 하영이에게는 어려운 문제인데 "이것도 못풀어! 방금 가르쳐 줬잖아!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이러다 보면 해서는 안되는 말도 하죠. "머리가 좀 나쁜거 같애. 이거 다시 해봐!"이러죠. 그럼 또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합니다. "넌 누구를 닮아서 이런거야?" 이 말은 저는 안 닮았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누굴 닮았다는 말입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와이프가 기분 나빠하는 거죠. 제가 정말 잘못했죠? 나중에 하영이가 좀 커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때 아빠하고 공부하는게 정말 싫었어!" 참 못나고 나쁜 아빠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좀더 성숙해지고 생각이 좀더 깊어지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내 눈높이로 하영이를 보니까 답답하고 부족했던 겁니다. 저도 하영이 나이 때 구구단 못외워서 나머지 공부하고 그랬는데, 옛날 생각안하고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 문제를 보니 쉽다는 생각 밖에는 안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서로를 볼 때 서로를 '어른으로 보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알고보면 다 부족하고 알고보면 다 실수투성이고 누구 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어린 아이 같은데 우리의 눈높이는 서로를 완벽한, 다 큰  어른으로 보니까 서로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겁니다. "저 분은 목사면서 왜 저러냐?, 장로, 권사가 되가지고 왜 저러지?" 자꾸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다 엄마같은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품고 또 품고 실수해도 부족해도 잘못한 일이 있어도 다시 시작하도록 격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유순한 자가 되는 것은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시선으로 아기를 키우듯이 서로를 바라보는 교회가 사랑의 돌봄이 가득한 교회입니다. 물론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하나님께 직분을 받다보면 돌봐야 되는 성도들이 더 많아집니다. 권찰이 되고 구역장이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됩니다. 목사가 되어 성도들을 돌봐야 하죠. 그 때마다 "나는 엄마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실수하는 모습 봐도 나는 엄마다. 허물과 부족함이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내가 품고 채워야 될 부분인 거죠. 엄마같은 자세를 가지지 않고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 실수에 대해 비판하고 판단하기 바쁘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는 줄 아십니까? "가면 쓴 교회, 가면 쓴 성도"가 됩니다. 교회에 와서 가면을 쓰니까 나는 아무 문제 없어! 거룩한 척, 경건한 척, 고상한 척, 깨끗한 척합니다. 서로의 아픔, 연약함, 허물과 부족함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고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가면을 쓰니까 오히려 교회오면 더 답답해집니다. 삶을 나누고 그런 나눔 가운데 숨겨졌던 눈물도 터지고 그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가 이런 교회가 아닐까요?  저를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엄마다" "나는 엄마다" 

 

바울이 이렇게 유순한 엄마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8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우리가 여기서 가볍게 넘어가는 말이 있는데, '사모하여'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 무게가 엄청난 말입니다. 한글로 하니 사모하다는 말이 성경 곳곳에 나와서 쉽게 넘어가 버리는 말이지만, 실제로 이 사모하다는 말은 원어상으로 신약성경에서 한번 밖에 안나오는 말입니다. 아주 특별한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해서 나타나는 갈망'을 담은 말입니다. 너무 보고싶고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애정이 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어디에 쓰여졌느냐하면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가 있잖아요. 그 부모가 자식의 묘비에 쓰는 말이 이 사모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무치게 보고싶다'는 말이 있죠.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안타까움, 꿈에라도 한번 봤으면 꿈에서라도 한번 만져 봤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담은 말이 '사모하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렇게 간절하니 무엇까지도 줄 수 있을까요? 복음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쁘게 줄수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그런 '사모하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일방적인 사랑, 목숨까지도 바친 사랑을 사도바울은 경험했고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랑,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거제 호산나교회 성도들, 아니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사무치도록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원래 어떤 곳일까요? 사랑과 돌봄이 있는 교회입니다. 누구의 사랑과 돌봄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돌봄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 사랑이 가득한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 사랑에 물들어서 살아갑니다. 내가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날마다 감격해하면서 찬양하면서 그 러브스토리를 늘 묵상하면서 내 마음에 심어서 그 사랑에 흠뻑 물들어서 이제는 누구든지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 그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고 꿈꾸고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물든 성도들이 서로를 그 사랑으로 물들여가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다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나아갈 방향은 사랑의 돌봄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물드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대체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내가 가졌던 강팍하고 폭력적인 마음은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돌봄이 가득한 거제호산나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에 물든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