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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오해를 넘어 이해로, 이해를 넘어 사명으로(사도행전 21:15~26) 본문

신약/사도행전

오해를 넘어 이해로, 이해를 넘어 사명으로(사도행전 21:15~26)

행복으로초대 2022. 6. 13. 04:04

오해를 넘어 이해로, 이해를 넘어 사명으로.(사도행전 21:15~26)

 

1.누구든지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오해를 받으며 살 때가 많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면 오해없이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합니다. 

 

2.성경 인물 중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아 =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조롱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모세 = 왕자의 신분에서 빈들의 양치기로 전락한 '인생의 실패자'라는 오해를

           면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셉 = 그의 형들에게 '꿈꾸는 자'라고 해서 허황된 꿈을 꾸는 자라고

           오해받고 미움받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는 성폭행범으로 오해를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원치 않는 오해를 받으면서 조롱과 미움을 받았지만

이 오해의 늪을 잘 빠져나왔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일들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사실 살다보면, 일을 하다보면, 내가 원치 않는 오해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해 받는 그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3.일단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20년 만에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얼마나 오고 싶었던 곳일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목숨을 걸고 가야하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빌립의 네 딸은 눈물을 흘리며 막았고,

제자들은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며 막았습니다. 

동역자였던 누가까지 나서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해 교회의 대표인 야고보와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신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바울의 보고를 받은 교인들은 모두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야고보와 장로들이 근심스럽게 한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 심각하게 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 아주 악한 감정이 가득하고 공공의 적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었습니다. 

 

20절 하반절을 보시면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 다 율법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유대인의 율법, 정결법, 음식과 절기, 특히 할례에 대해서 

유대인의 모든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몇 명이라고요. 수만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을 2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1.사도 바울이 모세를 배반했다.

2.유대인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라고 했다.

3.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고 파하라고 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굳이 과거 전통이 좋아서 할례와 음식과 절기를

지켜야 겠다고 한다면 굳이 막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전한 말이 퍼지고 퍼지면서 말에 말이 더해지고

사도 바울의 본 뜻과는 다르게 악한 소문이 퍼져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기 때문에 

어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이런 방법을 제안합니다. 

 

22절 부터입니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수만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니 그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다 알수 있도록 한가지 퍼포먼스를 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퍼포먼스였을까요? 

예루살렘교회에 나실인의 서원을 한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실인 서원의 규례 중 서원 기간 중

머리를 깍지 않는 규례가 있습니다. 서원 기간이 다 끝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헌신을 받아주심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머리를 깍습니다. 그런데 아마 나실인 서원을 하고 기간이 다 되었는데

제사를 드리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돈이 필요하죠? 그런데 제사드릴 돈이 없는 네 사람이 있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것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이 네 사람의 나실인들이 제사를 드리고 머리를 깍는 경비를 부담해라~

사도 바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수만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가 오해했구나! 바울도 율법을 존중하고 유대인의 관습과 전통을 지켜 행하는구나~

이렇게 오해가 풀리고 그동안 쌓인 미움과 적대적이었던 관계가 다 풀리지 않겠는가?

 

오해를 받으면 오히려 누가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냐고

싸우든지 변명을 하든지 해야 되는데, 오히려 바울 보고 자기 돈을 내서 결례를 행하라

억울하지 않습니다. 알고보면 다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다 오해를 해서 일어난 일인데

모함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오히려 사도 바울보고 나실인 결례를 행하는데 비용을 부담하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바울은 26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예루살렘 교회 대표들의 제안대로 그대로 따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해를 받을 때에 이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대해 왜 오해를 하게되었을까 이해를 했습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더 뿌리깊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태어나자마자 뼈속 깊이 물려받고 몸에 익힌 율법과 관습,전통이 

예수 믿는다고 한순간에 쉽게 포기하고 다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의 자라온 환경과 배경 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 이후로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절: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절: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의 관심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함으로 몇 사람이라도 구원받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관심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기꺼이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종이라도 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그것도 수만명의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오해와 미움을 받았으나

오해 받고 미움 받는 억울함을 푸는 것보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면 어떤 제안도 다 받아들이겠다

내 자존심 중요한 것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존심 때문에 고개 숙이지 못하고 싸우고 다투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원치 않는 오해를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그 때, 자존심을 한번 내려놓읍시다.

그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전무결하신 예수님께서

심한 오해와 미움을 받고 거짓 증인들의 모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오해와 미움, 모함과 조롱의 순간에 오히려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 예수님만 따르겠다고 하면서 우리는 왜 침묵하지 못할까요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십자가 붙들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다. 

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원수지고 삽니까?

 

어제 양육반 공부를 하면서도 다루었는데, 지금 신앙은 관계다! 이 주제로 몇주째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관계다. 신앙은 관계다. 신앙은 관계다. 아무리 강조해도 왜 이리 잘 안될까요?

최선의 다툼보다 차선의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든 싸우지 말고 화목의 직분을 행하십시오. 

오해를 넘어 이해하시고, 이해를 넘어 사명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