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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복음의 사람, 바울(사도행전 24:1~23) 본문

신약/사도행전

복음의 사람, 바울(사도행전 24:1~23)

행복으로초대 2022. 6. 18. 18:30

복음의 사람, 바울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더둘로 라는 변호사를 고용했습니다. 

이유는 바울을 고발하고 총독앞에서 재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발 내용은 이렇습니다. 

5절.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1)바울은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하는 전염병 같은 자다. 

2)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성전을 더럽힌 자다. 

이 두 가지 고발 내용은 바울이 종교적으로 혼란을 가져왔고,

로마 사회를 어지럽혔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행정관, 총독, 천부장, 백부장같은 로마군대의 지휘관들은

항상 긴장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에서 큰 소동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은 어떻게 하든 큰 문제가 없이

안정적인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총독들을 보면 시끄럽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총독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변호사 더둘로는 바울을 고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때문에 사회가 어지럽혀지고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니,

안정을 추구하는 총독의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제 고발된 내용에 대해 바울이 자신을 변호합니다. 

 

1)예루살렘에 온지 12일 밖에 안되었다.(11절)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고, 온지 열이틀 밖에 안되었는데,

무슨 소요를 일으키고 무슨 대단한 일을 벌였겠습니까? 이 말입니다. 

 

2)성전에 머무는 동안 변론을 벌이거나,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12절)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성전에 있는 동안 그 어느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3)유대인들과 같은 하나님, 같은 성경.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14-15)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나는 유대인들과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유대인 조상들이 믿었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을  사도 바울도 믿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단의 도를 따른다고 했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율법을

존중하고 결례를 행하는 등 불법이 없었습니다. (16-17)

 

오히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모함과 선동으로 인해 매를 맞고 돌로 쳐죽임을 당할 뻔 했다.(18) 

오히려 바울이 유대인들을 고소해야 함에도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입니다. 

단, 유대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임을 믿는다는 것 그것만 다를 뿐임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첫번째.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복음입니다.  

고발당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합니다.

15절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리라 한 메시야 그 분입니다. 

저도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두고 그 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는 메시야가 오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그 메시야가 예수님일 수 밖에 없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15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21절: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리라 예언된 

메시야 임을 총독과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히 전합니다. 

 

고발당하는 자리, 시간 속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모든 장소, 모든 시간 속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사람, 바울처럼 우리도 복음의 사람이 됩시다. 

 

또 한가지 우리가 말씀 속에서 생각해야 할

두번째는 복음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깨끗한 양심과 흠없는 삶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또 20절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무슨 말일까요? 복음의 사람, 바울, 또 복음의 사람, 우리가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깨끗한 양심과 흠없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항상 양심에 꺼리낌이 없는 삶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그냥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바르게 살자! 이런 구호 외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인생, 착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 최대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따라가야 할 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삶, 거룩한 삶, 손가락질 받지 않는 삶, 양심에 꺼리낌이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변호합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천하를 어지럽히는 전염병 같은 사람이라고 고발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꺼리낌이 없이 지금까지 깨끗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혹시나 제가 사람들 앞에서 잘못한 것이 있는지 그들이 증거를 대보라고 하십시오. 

있으면 말하라 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거제호산나교회 성도들만 봐도 압니다. 얼마나 착한지~~

그런데도 세상은 자꾸만 교회를 보고, 목사와 성도들을 보고 손가락질 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정말 착한 우리 거제호산나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도 착하지만 우리 끝까지 착하게 살아봅시다.

양심에 꺼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봅시다.

깨끗하고 흠없는 삶을 살아봅시다.

하지만 분명한 인생의 질문을 잊지 맙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복음을 당당하게 전하기 위해 

깨끗한 양심과 흠없는 삶을 살아내야 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착하게 삽니다. 

양심에 꺼리낌이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착함과 우리의 착함은 다릅니다. 

우리의 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이 새롭게 변화된 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전의 악한 성품과 생활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된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이 목적입니다. 

 

설교를 하는 저도 늘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말씀에 합당하지 못한 나를 보면서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한 때, 어떤 성도와 사이가 아주 안좋아지고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거의 1년간 사랑과 용서에 대한 설교를 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양심에 꺼리낌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후 그 성도와 화해하고 난 후, 

그 때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용서를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삶을 위해 

항상 양심에 꺼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속에서 생각할 것: 2가지

1)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복음을 하는 기회를 잡는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 

2)복음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깨끗한 양심과 흠없는 삶을 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