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유다서 1:17-23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본문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유다서 1장 20절)
유튜브 설교 영상 연결 https://youtu.be/N-FSkRdtO-E
19:10 경배와 찬양
41:10 설교
1:19:50 기도회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무엇인가?라고 할 때,
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믿음이 무엇인가요?
저와 여러분이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8절-19절에서는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성령의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은 즉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말씀해줍니다.
18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즉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욕대로 살아갑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이들이 조롱하는 것은 우리의 외모, 우리의 소유, 우리가 가진 것을 보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고 조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삶을 보고 조롱합니다.
예수 믿으면 도대체 뭐가 좋아서 예수 믿는다고 그러냐?
꼭 추석이나 설날, 형제들끼리 모였을 때.
예수 안믿는 형제들은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했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형제들은 가난하고 힘들게 사니까 이렇게 조롱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니들은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예수 믿지 말고 차라리 내가 믿는 불교 믿어라"
아니면 나를 믿으라 너를 믿으라
그렇게 하면서 자꾸 조롱합니다.
예수 믿는 삶에 대해서 조롱을 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조롱을 당해도 당당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없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육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으니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하는 행동,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이 육신에 속한, 죄에 속한
성령이 없는, 믿음이 없는 것인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기분 나빠합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 나같이 착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있냐?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내가 사기를 쳤어? 내가 강도를 했어?
내가 벌받을 만한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보고 죄인이라 하냐?"
그렇게 하면서 자신은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들어와 보니, 믿음 안에 들어와 보니 어떻습니까?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이 과정을 거치고 왔을 겁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눈물 뿌리며 회개하며 기도했던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예전에는 내가 죄인인줄 몰랐는데, 믿음 안에 들어와 보니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성령님께서 나를 깨닫게 해주시는데,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며, 영원한 형벌 심판아래 있었던 죄인이며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나, 소망없던 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이란 나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죄로 인해 죽은 나, 나의 죽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 얻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특징이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았다.
이것이 새 생명의 특징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이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믿고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내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사는 인생이 되겠습니다
이 고백을 하도록 성령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매일 묵상하고 매일 생각해야 할 것, 매일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죄인됨, 하지만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내게 주신 새 생명.
그 생명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나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만을 따르는 삶의 고백.
그 믿음대로 살겠습니다.
이것을 매일 고백하십시오.
그런데 이 믿음에 대해서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이 믿음에 지극히 거룩하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란?
믿음을 수식하는 말 “지극히 거룩한” 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믿음위에 자신을 세우라는 평범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알아야 할 중요한 말씀을 해줍니다.
믿음을 말하는데 지극히 거룩하다는 말을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다는 이 말은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한 분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을
믿음이라는 말에 썼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고 저 사람 믿음이 참 좋네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좋다 나쁘다
믿음이 크다 작다 판단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을 보고 그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은
믿음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며 믿음이 크다 작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믿음이 좋다 믿음이 크다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음'을 기본으로 하는
믿음 생활을 잘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한다는 말은 생활 속에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생활 잘 해야 겠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믿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믿음이란 내가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 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22을 펼쳐보십시오.
이 말씀을 딱 펼치는 순간, 여러분 모두 아~~~~ 하실 겁니다.
다 아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께 이 말씀드립니다.
오늘 제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 저는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만
전할 겁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말씀만 전할 겁니다.
마태복음 7장 21-22절 같이 읽어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조금 전에 믿음이란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그 믿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내 안에 살아계시는 나의 주, 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생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할 때는 믿음생활을 잘 하는 모습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 생활 속에서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 하나님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믿음생활 잘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주님이 잘 아는 사람들과 주님이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펴보겠습니다.
21절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주님이 모르신다는 말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죠?
여러분~~우리는 언제 주여 주여 합니까? 기도할 때 주여 주여 합니다.
기도 잘 하면 우리는 그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믿음이 좋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여 주여 해도 무엇이 빠지면 믿음이 아닐까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되어서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생활이 주여~~~주여~~~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수요예배 때마다 주여 주여 하는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여 주여 하며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계속해서 보십시오.
주여 주여 ~~~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본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믿음 아닙니다.
선지자는 누구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목사죠. 목사를 대표로 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들이 있는데
그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그 직분을 받은 목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성도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언변을 가진 사람일까요?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
즉 목사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는 목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목사의 기준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후임목사님 청빙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꾸만 무너져 간다고 하는데,
안타깝지만 그 이유 중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사를 세울 때, 세상의 기준을 따라 세우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세상적인 목회를 하고, 세상의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사람들이 보기에 세상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여러 조건들을 가지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어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목사"라면 주님이 모른다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단, 목사님을 보는 우리의 기준이 무엇인지 점검해 봅시다.
계속해서 봅니다.
주여 주여~~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엄청난 능력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귀신 쫓아내는 사람 보셨습니까?
귀신은 보셨습니까? 귀신들린 사람은 보셨습니까?
귀신 쫓아내는 능력, 많은 권능에 현혹되지 말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인데,
주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보통 예수님의 어머니가 오시면
어서 오세요. 여기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하면서
가장 높은 상석에 모시고 잘 대접을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나의 어머니냐? 누가 나의 형제냐?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어머니며, 형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불효막심해서 형제의 정도 없는 사람이라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그 고통스런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걱정하고
제자에게 부탁하는 효성깊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한가족이 되게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역할입니다.
성령님께서 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내 마음 속에 믿음을 막 불러일으키시는가?
하나님과 우리가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한 가족이 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믿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가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의 기도 잘함을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과
하나님과 한 가족 되는 것, 둘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
사람들에게 나의 말 잘함과 귀신쫓아내는 큰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하나님과 한가족이 되는 것,
둘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하나님과 한가족 되는 것을 위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 있는데,
그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다.
세운다는 말은 '건축한다'는 말입니다.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한다'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없습니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이 생각나시면 좋겠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서 1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7절에도 20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하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기억하라~
제가 조금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맨날 들은 말을 할 겁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은
맨날 듣는 말. 맨날 듣는 설교. 또 하네.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유다서를 듣고 읽는 당시의 성도들도 이 말을 했을 겁니다.
뭔가 새로운 말씀 없어요! 유다 선생님~~
새 책 쓰신다고 하면서 깊이 연구하시더니만
뭔가 신박한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또 똑같은 말씀 하시네.
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사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듣고 받은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듣은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그대로 전한 말씀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 진영태 원로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는데
제가 지금까지 진영태 원로목사님 설교하시는 것을 유심히 듣다보니까
한가지 패턴이 있더라구요.
바로 전에, 지난 전 주일의 설교를 꼭 언급하세요.
"지난 주일 들은 서대경 담임목사님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지난 시간에는 오후예배를 하셨으니까
"여러분~ 오늘 오전예배 때, 김창태 목사가 한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설교하실 때마다 이 말씀을 꼭 하시더라구요.
여러분~지난 주일 제 설교가 기억나십니까?
3일이나 지났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실 때인데, 기억하고 있으시죠?
기억하라!~ 기억하라~ 이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한 첫번째 해야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힘써야 할까요?
말씀을 기억하는 일에 힘쓰십시오.
들은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십시오.
여러분의 생활 속에 말씀으로 새기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그대로 묻어나올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만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사람이 됩니다.
유명한 예화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물론 어느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정말 정말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성도들끼리 사랑하며 사는지 참으로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었을까요?
예전에 한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예전에 한번 나누어졌던 교회였습니다.
서로 나누어져서 치열하게 싸웠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임하시고 첫 설교가 이 설교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부임설교가 끝나고 난 후, 성도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로 오신 목사님 설교 참 잘 하시네" 하면서
목사님 설교 잘 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 더 많은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나눔의 영, 분열과 다툼의 영에 사로잡혔다가 이리 저리 흩어졌던 성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설교 좋다는 목사님의 소문을 듣고 다시 왔습니다.
기대 가득하며 예배 참석했는데, 주보를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거 지난 주일 주보 아닌가? 설교 본문도 똑같고, 제목도 똑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이 지난 주일 했던 설교를 그대로 다시 했습니다.
점점 성도들의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이 지난 주일 했던 설교 다시 했다고 시끄러웠습니다.
한주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주보에, 그 본문에 그 제목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그 목사님 또다시 똑같은 설교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후, 당회가 모였습니다.
"목사님~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하지만 목사님은 묵묵부답입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에는 다른 설교를 준비해서 강단에 서주십시오."
그리고 한주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 그 제목에 그 설교를 그대로 하셨습니다.
교회가 난리 난리 여기저기서 소리를 성도들이 소리를 지르고
곧 목사님이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목사님의 설교가 뭔가 달랐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사랑하라 했는데, 그 말씀 들은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그런데 왜 여전히 우리 교회는 나뉘어져 있습니까?
왜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왜 여전히 서로 다투고 있습니까?
제가 한달 전에 했던 설교를 할 때나 지금 이 설교를 할 때나
우리는 여전히 다투고, 여전히 분열되어 교회가 반쪼가리가 나 있는데
우리는 왜 이 모양으로 살면서 왜 주님 말씀 듣지 않습니까? 사랑합시다."
그 목사님의 눈물이 흘러, 성도들의 눈에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명 한명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설교 중간 중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로운 설교, 새로운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맨날 듣던 말씀 전할 거라구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들어도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들어도 들어도 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다면
과연 말씀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중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목사, 선한 목자 보내실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 잘 전하는 목사, 설교 잘 하는 목사, 기도 잘 하는 목사,
세상의 조건 다 충족시키고, 뭔가 대단한 목사.
누구를 세우실 것인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가려서 하실 것입니다.
저도 걱정 많이 했는데, 계속 기도하다 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걱정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목사님과 함께 할 우리가 준비되어 있는가?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려는 준비를 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는 준비를 제대로 해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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