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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마가복음6:1-6 편견에 갇힌 곳에서는 권능을 행할 수 없습니다 본문

신약/마가복음

마가복음6:1-6 편견에 갇힌 곳에서는 권능을 행할 수 없습니다

행복으로초대 2022. 12. 13. 04:14

마가복음6:1-6 편견에 갇힌 곳에서는 권능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진리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열심이 없는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권능을 행할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장 3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어둔 세상에 새벽빛같이, 메마른 땅을 촉촉히 적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같은 놀라운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깊은 만남과 친밀함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권능을 행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시간, 따라하세요.

"편견에 갇힌 곳에서는 권능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놀람은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고

바로 어릴 때부터 봐왔던 예수님에 대한 어떤 편견에 갇히게 되고,

서로 수군수군 거립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 맞습니까? 

나사렛에서는 요셉의 아들이죠~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뭐라 그랬어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왜 그랬을까요?

 

첫 번째 편견, 과부의 아들입니다.

이 때,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아들'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 는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편견이 있어요.

과부의 아들!

우리 한국 사회에도 전통적으로 과부에게서 자란 아들을 보고

아비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3대 사회적 약자가 있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입니다. 

이 3대 사회적 약자는 항상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으면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그룹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부의 아들이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리 전무한데, 

도대체 저 가난한 집안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저 예수가 도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이게 말이돼?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어릴 때 친구요, 동기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야~~ 내가 어릴 때는 예수 보다 성적이 더 좋았는데, 

예수 저거 성공했네.... 이런 느낌입니다. 

 

두 번째 편견, 부정의 씨앗입니다.

사실, '마리아의 아들'

이 말속에는 더 깊은 경멸이 깔려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가까이 살던 이웃 사람들은

이 집에서 일어난 스캔들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마리아가 처녀 때 애 뱃잖아~ 그 작품이 예수잖아!”

속도위반 아니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야!”
이 편견이 아직도 나사렛 땅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편견이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권능을 행하시는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능력을 제한하는 편견의 벽.

사람들의 편견에 갇혀버리면

그 사람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교회에서 사역할 때 / 경주에서 사역할 때

-모교회에서 1년을 사역하면서,

교회가 개척된 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첫 교역자였기 때문에

사랑을 받으며 사역했습니다. 하지만 힘들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역자로 보기 보다. 

내가 니 똥기저귀까지 다 갈아줬는데, 

내가 니 주일학교 선생님인데,

옛날 코 찔찔이가 전도사님이 다 되고...

창태형, 창태오빠, 야~~ 창태전도사~~ 이런 분위기와 생각과 상황속에서

사역하는 것에 제한이 너무 많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죠.

 

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모교회에서는 편견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모교회에서 1년 딱 사역을 하고, 경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어린 27살 된 전도사에게 교회 온 성도들이

주의 종이라고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교역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연세 많으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귀한 전도사님~"하면서 정말 귀하게 여기기 시작하니, 

사역에 얼마나 큰 부흥의 일들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교회의 성숙도인데, 성숙한 교회에서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됩니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목사를 비롯한 교역자들일지라도

교회 성도들이 편견을 가지지 않고 모교회 출신 신학생과 교역자와 선교사들의

사역에 힘을 더해주고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면,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이 목사와 선교사의 꿈을 꾸고 비전을 품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목사와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됩니다. 

 

양육과 훈련을 통해 세워진 사역자들과 직분자들에 대해 

성도들이 그 소중함을 알고, 존경을 보내고,

그 사역에 대한 가치와 그 사역자에게 대한 인정을 제대로 하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입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에 빠지면 안됩니다.  

 

1차적인 적용:  

말씀의 은혜, 말씀의 감화, 감동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는 

메시지와 메신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와

말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에 따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를 때가 많죠.

젊은 전도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원로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가요?

아니요. 같습니다. 메신저는 다를 지 몰라도, 

그 전해지는 말씀, 메시지는 같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도의 마음이 좋은 밭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둡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 들을 귀 있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부족하죠. 인격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말씀을 전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삶의 예배에 대해 많이 강조하는데, 

삶의 예배의 잣대를 말씀을 전하는 목사에게 갖다 댈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말씀을 말씀대로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성경대로 풀어가고

그리고 전하는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성도는 선포되는 말씀을 설교자와 동일하게 보지 마십시오.

설교자의 흠이 보이고 설교자의 부족함이 자꾸 보여서 은혜의 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2차적인 적용: 

사람마다, 교회마다 그 사람과 그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긍정적인, 좋은 이미지로 만드는데

엄청난 힘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교회 만들기를 위해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자기 스스로를 부정적인 생각과 말로 부정적인 편견에 갇혀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다라는 편견에 갇히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는 믿음의 생각과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같은 상황,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다른 평가를 하게 합니다.

바로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으로 사람을 보고 믿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믿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새벽의 기도로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믿음의 생각과 말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놓치지 않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