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십자가를 맞이하는 예수님(막14:32-42) 본문
2021년 3월 28일 주일 거제호산나교회 오전예배
십자가를 맞이하는 예수님(막14:32-42)
고난주간입니다. 절기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자꾸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때마다 시마다 절기를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종려주일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 다음 주일 부활주일을 통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한 주간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십자가를 맞이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지 기대하면서 함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남겨두고 돌 던질만한 거리에 떨어져서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러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평소 믿음직하고 바라만 봐도 듬직하고 예수님 바라만 봐도 평안이 임하는데,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이상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이 놀라십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십니다.
그것도 조금 놀라시고 조금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34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제자들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된다. 죽---을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이죠. ~~해서 죽겠다! “고민돼 죽겠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실까요? 우리 예수님이 말입니다. 왜 이리 놀라셨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을 슬프게 했을까요? 왜 죽겠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앞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실까요?
2.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1)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계속 말씀해 오셨습니다.
2)또 십자가 죽음 후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그 말씀이 아니라도, 교회역사 중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 중, 순교자들을 보면, 순교자들은 태연하게 순교를 당합니다. 불에 태워져도 창에 찔려도 사자에게 찢겨 사자밥이 되어도 담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따랐던 우리 예수님이 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3.
예수님이 왜 놀라시고 슬퍼하셨는지?
왜 예수님의 마음이 고민되어 죽을 것 같은 지경인지?
예수님이 십자가가 두려워서 이러시는 걸까요?
살을 찢는 채찍과 날카로운 못과 가시면류관,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못박히는 수치심,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조롱 그것이 두려워서 무섭다 슬프다 고민된다고 하실까요?
그래서 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와서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시고, 오죽하면 아빠~~~~아버지라고 하시면서 육체의 고통이, 십자가의 고통이 무서워서 이렇게 기도하고 계신 걸까요?
4.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두려움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경험해 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이 겟세마네에서 경험하신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정도의 하나가 아니라, 완벽한 하나! 불가분의 관계, 도저히 끊어질 수 없는 하나됨. 그 하나된 아버지와 관계가 끊어지는 것, 그 단절의 고통이 예수님을 두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육체가 감당해야 할 끔찍한 고통보다도 하나님과 끊어지는 고통이 가장 무섭고 두려우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을 때의 고통"이라고 합니다.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지금 함께 예배드리는 분들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청년 때, 친하게 지냈던 아는 형님의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장래를 치루고 바로 뒷동산에 어머니를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님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셨던지, 매일 뒷산에 올라가 산소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하루일과가 무덤옆에서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무덤 옆에서 "이 사람아~~너무 보고싶네. 그리 혼자 가니 좋나? 나만 남겨놓고 나는 어쩌라고..그리 가시나?" 무덤을 툭툭 치면서 그러셨다고 합니다. 그 형님이 저에게 “창태야 우리 아버지 위해 기도 좀 해줘라. 지금 아버지가 너무 힘들어한다”그러더라구요.
그렇게 슬퍼하고 아파하시다가 딱 1년 되는 날을 기준으로 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게 맞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라는 것 아닙니다. 이런 순애보, 이런 러브스토리가 있나? 이런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어도 예수님 믿고 힘을 내서 살아야죠. 단, 그 때 제가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끊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과 아픔이며,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인지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5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했던 하나됨이 끊어져 분리되어야 하는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짐작할 수 있으십니까? 그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은 그 고통이 두려운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힐 육체의 고통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처절한 외침에서 예수님의 고통, 그 아픔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6
나는 무엇으로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걱정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놀라고, 나는 무엇으로 고민하는가?
나는 아이고~ 죽겠네. 죽겠네 하는 말에 나는 어떤 말을 붙이는가?
배고파 죽겠네. 반대로 배가 불러도 배불러 죽겠네
어떤 때는 바빠서 힘들어 죽겠네. 일이 너무 많아 피곤해 죽겠네 하다가 할 일 없으면 심심해 죽겠네 슬퍼죽겠네 하다가도 웃겨 죽겠다고 하고...
나는 어떤 일들에 죽겠다고 합니까?
7
오늘 말씀에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육체의 고통이 영적이 고통보다 더 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한 사람은 육체의 고통보다 영적인 고통이 더 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 육체의 고통이 영적인 고통보다 더 큰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자들입니다. 37절입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예수님께서 돌 던질만한 거리로 가서 기도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기도하자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가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자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느냐~니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
38절에 왜 깨어 있어야 하는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뭐가 약해서요? 육신이 약하다. 육신이 피곤하다. 육신에 잠이 온다. 육신에 여러 가지 아픔과 고통이 있다. 육신에 슬픔이 있고, 육신의 힘듦이 지배를 하면서 영적인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육체의 고통과 영적인 고통, 이 둘 사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번에는 육체의 고통보다 영적인 고통이 더 큰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왜 아파하셨다구요? 예수님이 뭘 두려워하셨다구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채찍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거요? 십자가의 날카로운 못이 두려울까요? 사람들의 조롱이 무서울까요?
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영적인 고통, 하나님과 깨어지는 고통입니다. 바라기는 육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을 비교했을 때,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 깨닫고 영적인 고통이 육적인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나! 이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8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졌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면,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있다면,
영적인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보지 않아도, 예배드리지 않아도,
코로나 시대에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점점 더 편해지고 좋아지고 익숙해지면서 어떤 분들은 예배의 자세가 흐트려져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아서 두렵습니까?
성경보지 않아서 배가 고픕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두려움처럼 온전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의식중에 육체의 고통이 오면 어떻게 하든지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보지 않아도 예배드리지 않아도, 복음전하지 않아도, 순종하지 않아도 경건의 모양과 능력으로 살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냥 평안하게 살고 있는 나를 보고 회개합시다.
9.
오늘 말씀에서 또 한가지 생각해 할 것이 있습니다. 관계의 소중함입니다.
우리는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면 어때 뭐? 안보면 되지? 헤어지면 되지 뭐!" 그만두면 되지, 떠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부사이에, 친구사이에, 직장 동료 사이에, 심지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성도들 사이에 이렇게 말할 때, 눈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문제를 보셔야 합니다.
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끊어짐, 깨어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그 관계를 정말 소중히 여긴다면 아내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성도사이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소중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관계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와 깨어짐에 대해, 끊어짐에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마십시오.
관계가 깨어지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또한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10.
한 초등학교 앞에서 전도할 때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학교 정문에서 나오는 아이들에게
"애들아~~ 내일 우리 교회에서 전도축제하는데 우리 교회 안올래?"라고 하니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끊었어요?"
교회가 무슨 어른들 술담배 끊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교회와 끊어지면 죽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싫어서 교회에서 떠나“혼자 신앙생활 잘 하면 되지”라고 하시지만, 아닙니다. 교회에서 시험들었다고 하시면서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 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떠나면 죽습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관계에 있어서 힘들고어려웠던 분들이 계시다면, 예수님 생각하면서 회복하십시오.
그 어떤 고통보다도 영적인 고통,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는 우리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이 고난주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의 아름다운 연합, 하나됨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연합 속으로 뛰어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던 여러분! 다시 하나님의 따뜻한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갑시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의 진정한 회복이 시작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납니다. 아멘!
11.
이제 우리가 여기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 중,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한 가지 고통이 더 있습니다. 바로 잃어버린 사람들,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들과의 끊어짐입니다.
그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끊어짐의 원인이었던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죽음의 언덕을 오르려고 합니다.
12.
하나님 아버지와의 끊어지는 고통도 너무나 크지만, 그것보다 더 큰 고통.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끊어진 관계로 오는 아픔, 잃어버린 사람으로 인한 고통의 문제를 회복시키려고 마음을 다 잡으십니다. 그 곳이 바로 겟세마네 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36절에..."아빠 아버지~~~~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정말 이 방법 밖에는 없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소서.
하지만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13.
겟세마네는 나의 육체의 고통보다 하나님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곳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느끼고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 곳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교회는 나의 원대로 사는 인생을 끝내는 곳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살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원대로,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럼 그 겟세마네가 어디일까요? 자세히 보니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나의 원대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삽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니가 하고 싶은 대로 니 원대로 살아왔던 자들아~그 인생을 여기서 끝내고 이제는 하나님의 원대로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나의 원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나를 버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를 버리는 훈련을 받고 세상에 나가 아버지의 원대로 사는 훈련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훈련을 잘 받아야 교회가, 성도들이 해야 할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곳에 있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좋은 교회 거제호산나교회에 있다면 여러분의 원대로 살았던 인생 끝내고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직 나의 한 가지 생각, 오직 나의 한 가지 관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나의 모든 다 내려놓고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는 살겠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기도하고 내일도 기도하고 나의 평생에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거제호산나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훈련을 받기에 너무나 약합니다. 마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과 똑같아요. 함께 기도하자고 했는데, 기도하지 못하고 육신이 피곤해서 잠이 들어버리고, 기도하자고 했는데, 힘이 없어서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잠이 들고 말았어요. 꼭 우리 모습 보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연약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42절입니다.
42절 일어나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들, 아니 연약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세상의 원리는 뒤처지는 사람, 안되는 사람, 실력없는 사람 제쳐두고 그냥 잘 하는 사람 데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능률과 효과를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원리와 다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연약해도, 아무리 기도하자고 간곡히 부탁해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린 연약한 제자들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일어나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연약합니까? 부족합니까? 우리 예수님은 괜찮아 괜찮아 내가 너와 함께 할테니 우리 같이 가자! 일어나자! 내가 니 손 잡고 갈게. 내가 너의 부족함을 알아~그래도 니 연약함을 내가 담당할테니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외치시는 예수님이 음성이 오늘 여러분의 귓 전에 쨍쨍하게 울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 누가 있습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이 제자들의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래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18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베드로의 삶의 방향 또한 자신의 원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사는 인생이 됩니다.
"젊어서는" - 자신의 힘이 넘쳐나는 시절: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던 때.
"늙어서는" - 자신의 힘이 다 빠지고 누군가에게 이끌림을 받아야 되는 때.
니가 젊어서는 이라는 말이 있고, 니가 늙어서는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젊을 때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자기 원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자기 주장대로 살아왔던 베드로였습니다. 자기가 살아서 꿈틀꿈틀하던 베드로 였습니다.
그런데,‘그가 늙어서는~’
여러분, 이것이 단순히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인가?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인가?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를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젊은 사람입니다.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힘이 있어서 내가 원하는대로 다니는 인생이 좋은 인생일까요? 그 인생이 행복한 인생일까요? 그 인생이 여러분이 원하는 인생입니까? 비록 내 힘은 없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실 때 그 인생이 좋은 인생이요 행복한 인생인 줄 믿습니다.
겟세마네는 우리의 기도의 방향을 정해줍니다. 겟세마네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정해줍니다.
베드로의 마지막은 결국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너의 인생의 마지막은 십자가야. 너의 인생 마지막은 죽음이야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야~
예수님께 부름 받을 때부터 마지막 죽음의 때까지 그의 인생은 이렇게 변합합니다. 살고 죽는 것이 자기 원대로 살던 인생에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해서 죽음 조차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약한 거잖아요. 죽음은 불행한 거잖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약함, 불행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맞이하십니다. 고난 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향해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짐은 세상의 그 어떠한 고통보다 더 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진 나를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져도, 끊어져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나를 한번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갖가지 문제들로 인한 고통에 힘겨워하며, 죽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나오지 않은 우리를 회개합시다.
하나님과의 끊어짐의 고통이 너무나 크지만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십자가를 맞이하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기도대로 우리도 기도하고 기도대로 삽시다.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나의 원대로 살려는 나를 버리는 곳, 이 거제호산나교회에서 날마다 나를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살아가기로 작정합시다. 훈련받읍시다. 우리 모두 아버지의 원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 모두의 삶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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