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요한일서 2:7-11 진정한 영성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있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진정한 영성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 이 시간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우리의 굳어버린 심령을 터치해서 변화시키는 은헤가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말씀은 사실 참 설교하기도 어렵고 듣는 사람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흔하게 말하지만 가장 다루기 힘들고
지식으로는 이해되지만 살아내기 어렵고
가장 실천하기 힘든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 사람 참 영성이 깊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얼마나 말씀을 잘 알고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영적인 은사가 강한지? 이런 것들을 봅니다.
그래서 영적인 생활, 영성이 깊은 삶을
개인적인 경건생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말씀 연구하고 혼자서 찬양하고 혼자서 예배하고
혼자서 하나님을 잘 만나면 그것으로 깊은 영성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 수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과 등지고 홀로 고행을 하고
홀로 높은 탑에 올라가 수행하는 것으로 영성이 깊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하면 요한일서 말씀이 참 어렵다는 말입니다.
지식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적으로 너무 쉽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살아내기는 나의 영성이
완전히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영성, 즉 영적인 성품의 정도를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성의 수준을
이 사람이 얼마나 형제를 사랑하는가의 정도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말할 때 사도 바울이 풀어낸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의 영성, 즉 영적인 성품이 육체를 따르지 말고,
그저 성령님께서 우리를 다스리고 인도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술의 지배를 받게 될 때,
그는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말을 하거나,
불안정하게 걷거나, 의사 결정이 둔해지는 등의 어떤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상태를 오늘 말씀 9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한 상태, 즉 성령의 다스림과 이끄심을 거부하는 상태를
어둠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빛가운데 있는 상태와 어둠 가운데 있는 상태를
무엇과 연결하느냐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결국 영성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상태이며
그런 사람을 무엇과 같다고 하느냐하면
그는 눈이 먼 영적 장님, 참소경이라고 합니다.
보이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
분명히 본다고 하는데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처음 말씀을 시작할 때, 요한일서가 어려운 이유라고 했습니다.
아는데, 지식적으로는 아는데 실제 살아내기는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눈을 갚고 귀를 닫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덮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7절과 8절입니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새계명과 옛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합니다.
새계명을 쓰는게 아니라 그 새계명이 원래 듣고 , 알고있는
옛계명인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계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계명을 쓴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것이이라고 합니다.
새계명이 아니라고 했다고 새계명이라고 했다가
도대체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가?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둘다 맞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엣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 동일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를 읽는 성도들이 전혀 듣도 보다 못한 말씀을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들은 말씀입니다. 계속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보다 예수님과 사도 요한은 조금더 발전시킵니다.
옛계명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갚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의듣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즉 나를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목숨을 줄 만큼의 사랑까지 말합니다.
그러니 옛계명과 다른 새계명을 쓰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만나는 중에 정말 많은 분들이
관계의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답답해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답'을 알고 계세요.
그 답은 분명히 '사랑'입니다. 분명히 사랑해야 함을 압니다.
하지만 아는 그 답대로 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확실한 것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랑'의 길을
가려고 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처음, 중간, 마지막 단계 등의
각자의 위치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한 것이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하나님의 답인 '사랑'의 길에 들어서서
느리기도 하고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조금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뭐지?
옛날 같으면 판단하고 정죄하고 했을텐데
성령의 이끄심과 말씀의 훈련을 통해 변화되고 있어요.
사랑하니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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