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요일1:1~4 사귐과 누림 본문

신약/요한일서 완료

요일1:1~4 사귐과 누림

행복으로초대 2022. 4. 20. 14:51

첫째, 신앙생활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추상적, 형식적, 종교적인 신앙은 우리가 성황의 길을 걸어가는데 

치명적인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들은 참 추상적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 뭐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뭐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뭐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무엇입니까?

 

사실 이런 표현들의 개념, 원리와 방법을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추상적이며, 형식적이며, 종교적인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추상적이고 형식적이며 종교적으로 변하지 않도록

예수님 당신을 통해 우리에게 실체적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십니다. 

 

1절, 2절을 보시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생명, 영원한 생명,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

이 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의 빛이 되시며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 예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들을수도 볼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다 가지고

죄도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그 육신이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공허한 메아리, 추상적인 사랑이 아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할렐루야~

여러분~내 몸을 관통한다. 내 몸을 통과하여 

말씀이 눈에 보이는 실체가 되고 

 

여러분! 

영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이 처음에는 보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시작할 때, 

그 사람이 어제까지 예수님을 안 믿다가 오늘 믿고 거듭났다 해서

갑작스럽게 사람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게 되면,

영적인 변화는 반드시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 반드시 일어납니다.

 

내가 지금 하는 영적인 행동, 영적인 생활.

예배를 즐거워하고, 기도를 한다든지, 말씀을 읽는다든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반드시 이 땅에서 우리의 현실 가운데

분명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귐은 코이노니아

모든 영적인 변화의 실체는 사귐 속에서 나타납니다. 

나와 너의 사귐 속에서 나타납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다라고 할 때,

관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영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영성이 있다 내가 신앙이 있다는 말은 

내가 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겉으로 실체로 드러나서

우리의 신앙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신앙이 되는 것,

그것을 영적인 사람,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실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실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듭남의 귀한 선물로 구원받았다면

내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신다면

내 안에 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가족, 남편, 아내, 자녀, 친척, 성도들, 이웃, 친구, 직장 동료 등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거듭나지 않았다든지, 

내 안에 영적인 무엇인가가 걸림돌, 장애물이 되어

나의 변화를 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는 이것을 말하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귐을 가질 것인가?

이것을 코이노니아 라고 합니다. 사귐, 친교, 교제.

이 코이노니아 안에서 복음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적인 가르침을 주는 책이 바로 요한일서입니다. 

 

사귐, 이 코이노니아는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쓴다는 말은 요한일서를 쓴다는 말이고

사도 요한이 듣고 보고 만진 예수님을 전하는 목적은

3절에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다. 

즉 사귐을 위해서 요한일서을 쓰며 이것을 읽어보는 모든 성도들마다

기쁨이 충만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요한일서를 통해 기쁨이 넘치게 될까요?

요한일서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으로도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이유는?

3절을 이미지로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먼저,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을 먼저 경험하고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까지 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것이 사귐입니다. 단순히 먹고 놀자 하는 사귐말고, 

생명이 걸린 사귐입니다. 이 사귐을 위해 손을 내밀고 

아픔과 슬픔, 고통과 눈물, 참된 생명을 알지 못하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었는데

이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손을 내가 잡았는데, 맞잡은 그 손으로 무엇이 흘러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의 '누림'이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누렸던 하나님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은혜, 능력, 용서와 자비

함께 하심,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맞잡은 손의 사귐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손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손을 특별한 손입니다. 

이 손을 내미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귐 가운데 하나님과의 풍성한 누림이 

흘러흘러가서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 서로 손 잡읍시다. 지친 손을 잡아 주고 힘든 손을 잡아주고

상처난 손을 잡아 주고 울고 있는 손을 잡아주고 슬픔속에 잠겨 

두 손모아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의 손을 잡아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