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2024부활주일: 슬기로운 부활생활1(요20:19-23) 본문
2024부활주일: 슬기로운 부활생활1(요20:19-23)
슬기로운 부활생활1
<도입> 3일 무덤 렌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지낸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와 그의 집안에
사용하려고 파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 지내고 난 후,
그 소식을 들은 친한 친구로부터
핀잔을 들었습니다.
“자네 미쳤나?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판 새 무덤을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수에게 내 주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그러자 아리마대 요셉이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야야야~~ 이 친구야 괜찮아~~
예수님이 주말에만 3일 정도
잠깐 쓰시겠다고 했거든.”
할렐루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죽음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죽음이, 무덤이 예수님을 가둘 수 없으며
예수님은 생명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찾으심
부활 후에 예수님은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간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건지 의문이 드시죠?
예수님께서 찾아간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간 제자들의 상태가 어떤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은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세상을 향해
문을 꼭 걸어잠군 상태입니다.
제자들은 다 낙심하고 좌절한 상태입니다.
그렇게도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명을 넣어주셨건만
그 사명도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달려가던 목표가 사라져서
인생에서 어디로 가야 될지 방황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문을 굳게 잠군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리고
고기나 잡으러 갈란다 하면서
다시 고기잡는 어부가 된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고
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영주시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는 이런 분들이 없습니까?
이런 제자들과 내가 비슷하지 않습니까?
한 때는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정말 열심히 충성했는데,
한번의 충격, 아픔, 상처 때문에, 다시 아프기 싫어서
상처받는게 두려워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
관계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주신 사명으로 가슴이 뜨겁고
불타는 사명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명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세상고기나 잡으러 다니며
인생의 참된 의미는 생각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찾아가심을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오.
예수님의 찾으심.
찾아가심을 찾으심으로 바꾸면,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것은 단순한 방문이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만나러, 친구만나러,
제자만나러 가는 만남이 아닙니다.
단순한 만남, 방문보다 더 큰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바로 찾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움에 마음의 문을 걸어잠그고 움추려든
사명과 열정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아픔과 상처에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면서
쪼그라든 사명과 열정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세상 살이에 뒤로 밀려난
사명과 열정을 우리에게서 찾으십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함께 떠오르는 단어가 생명, 생명력, 다시, 새출발
이런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생명을 다시 감사하게 하시고,
이제 생명력 넘치는 믿음의 삶을 다시 일으켜서
새출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힘을 내십시오. 주저앉아 있는 내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이것이 슬기로운 부활생활입니다.
둘째. 평강을 주심
두번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19절 중간부터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로
한 순간에 사랑하고 신뢰하며 따랐던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평강'이었습니다.
분명합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평강이 없는 인생입니다.
따라하세요.
예수님 없는 인생은 평강이 없는 인생이다.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사라지고
평강의 자리를 대신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평강이 없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도
에덴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그 즐거움의 자리를 두려움이 대신 차지합니다.
창세기 3장 10절
이르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예수님 없는 인생은 결국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동안
예수님의 그늘 아래서
안전히 살았고 풍성하게 누렸고
근심걱정없이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에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즐거움이요 예수님이 안전이요
예수님이 풍성이요 예수님이 평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잠시 떠난 동안
그들은 말로 할 수 없는 위험과 두려움과
근심걱정 속에서 노출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의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두려운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19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까지
부인하게 만든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발각이 되면 유대인들에게 잡혀
예수님처럼 똑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사라지고
예수님이 없으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의 손에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두려워하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분명히 죽으셨으나
분명히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두려움은 물러가고 기쁨이 채워졌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눈과 귀에서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과 생활 속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단을 이기십시오.
예수님으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으로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으로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끊임없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마음에 품고 보고 듣고 함께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슬기로운 부활생활입니다.
셋째. 보내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숨어버린 제자들, 문을 꼭꼭 걸어잠근 제자들,
힘도 잃고 사명도 잃고 식어버리고 방황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불덩이였던 제자들이 식어버려서
숯덩이가 되어버렸는데, 그들 속에 있는 불을 찾으시고
다시 불을 붙입니다.
제자들이 불덩어리가 아니라 숯덩이가 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그 두려움에
평강을 선포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는 것은 과정입니다.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예수님의 최종목적은
사명을 다시 주고 보내심입니다.
그래서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있는 사람들.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내십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실까요?
마태복음 28장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우리 영주시민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도 주시고 기쁨도 주시지만
평강에 속지 마십시오. 평강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기쁨에 속지 마십시오. 기쁨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주께서 주신 평강은 중간과정입니다.
주께서 주신 기쁨도 중간과정입니다.
우리 삶이 평강하다고, 기쁨이 충만하다고
그것을 은혜라는 말로 도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분명히 평강과 기쁨을 주시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끝까지 보셔야 합니다.
사명입니다. 다시 영주시민교회가 되어 주십시오.
다시 복음으로, 다시 말씀으로, 다시 영혼구원으로
다시 영주를 살려내는 불타는 사명자들로 일어나 주십시오.
사명에는 늘 두려움이 따릅니다.
불타는 사명이 있다고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의 크기만큼 부딪쳐 오는 두려움도 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명이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사명에 함께하심을 더해 우리를 보내십니다.
복음으로 다시 일어나 주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위해 힘을 내 주십시오.
'두려움'이 있습니까?
혼자 있으면 두렵습니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그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예~맞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두렵지 않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서 재밌는 놀이를 할 때,
항상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숨바꼭질 할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엄지척.
그러면 다 엄지에 손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재밌는 놀이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면서
예수 위해 살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손을 들어 예수님 엄지에 손을 붙이는 것이
슬기로운 부활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에 함께 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4월,5월 VIP초청축제!
주사랑 행복나눔축제가 시작됩니다.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우리 영주시민교회 성도 여러분~
평강과 기쁨을 지나 사명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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