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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마태복음 6:5~8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21-골방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본문

신약/마태복음

마태복음 6:5~8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21-골방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행복으로초대 2024. 7. 13. 12:17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기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는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기도를 좀 더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했는데,

오히려 기도가 많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형식화 시켰습니다.

내용, 절차, 순서, 시간 등, 제품을 만들 듯이 기도를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쉐마' 라고 하는 것인데,

신명기 64절에 있는 구절을 그대로 반복해서 외웁니다. 
쉐마기도는 해뜨기 직전의 아침과 해가 진 저녁에 암송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주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시니.'

이렇게 하나의 기도문으로 만들어 계속 외우게 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기도문을 만들어 반복해서 외우게 하고, 그것을 기도라고 했습니다.

'밥 먹기 전에 하는 기도, 밥 먹은 후에 하는 기도,

취침시간에 하는 기도, 아침에 하는 기도.'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시간도 정했습니다.

9, 12, 3시는 기도시간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이런 기도 문화가 예수님 당시에 온 세상에 만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형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외식과 위선에 빠집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예루살렘 거리, 시간은 12.

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럼 일반사람들은 한 1,2분 정도 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손을 높이 들고 오랜 시간 계속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 저 바리새인 참 기도 많이 하시네.

참 경건하신 분이야~”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더 시간을 끌면서 손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맛을 알게 되자

일부러 기도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이나 회당거리,

아니면 큰 도시 모퉁이에 서서 기다리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주 꿰뚫어 보시고

5절 끝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희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죠.

경건하게 보이려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에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나타낼 수 있는데, 기도를 하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면

하나님은 사라지고 기도하는 사람만 보이게 됩니다. 

 

두 번째 잘못된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였습니다.

 

7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의미가 있는 말이라도 생각을 담지 않고 말하는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기도를 형식화 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그 기도는 틀림없이 중언부언의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반복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반복하셨습니다.

성경에는 3번 밖에 반복이 안 나왔지만

우리가 볼 때에 그렇게 긴 시간 3번만

반복해서 기도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힘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 한마디만 하셨겠습니까?

 

다섯 번만 하셨겠습니까? 10, 20번도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도를 반복하실 때마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피가 섞였습니다.

자기의 전인격, 모든 힘을 다 그 말 한마디에 담아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아무리 반복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

그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말씀 속에서 찾아봅시다.

 

첫째, 하나님은 골방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골방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골방이라고 해서 작은 공간, 작은 방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우리는 골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과만 상대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란한 세상을 피하여

산이나 저 들판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산이 골방이었습니다.

들판이 골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골방에서 기다리시고 계실까요?

여러분~아무하고나 골방에 들어갑니까?

골방에서 만나자는 게 아무에게나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사람이 없는 데만 찾아다닙니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단둘만의 공간을 찾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부부 가운데서도 별로 애정이 없는 부부는

아내가 "여보, 방으로 와요. 단둘이 얘기할게 있어요"라고 하면

왠지 남편은 내가 뭘 잘못했나? 결혼기념일인가?, 생일인가?

생각이 막 복잡해지죠.

 

하나님은 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원하십니다.

복잡한 세상, 수많은 사람들 속에 생각이 산만해지는 곳 말고

온전히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골방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방을 좋아하십니다.

 

기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와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만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소중한 은혜의 방법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317절에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보시면서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진정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시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만남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만 쳐다보고 살면 못 삽니다.

24시간, 일주일, 365.

매일 사람만 상대하고 인생을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람 만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숨이 막혀 못 삽니다. 답답해서 못 삽니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견디지 못합니다.

 

상처주고 상처받는 세상에서 사람보다

하나님 만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 거짓되고 더럽고 냄새 나는 세상에서,

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을 만날 때 우리가 치유 받습니다.

그분을 단둘이 만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가득히 채울 때,

내 눈에 눈물을 씻고 다시 한번 웃으면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보면 안됩니다. 세상만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방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기상이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계속 흔들리고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벨트를 매라는 신호가 나옵니다.

그런데 뒤에서 자꾸 웃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가 자꾸 웃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귀에 리시버를 끼고 있더랍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들으니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웃는데 자기 혼자 웃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즐거운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이 깨달았답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저 사람은 듣는 것이 있고 나는 듣지를 못한다.

그것이 틀리구나.' 여기에 큰 진리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 앞에 있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높아

보이지만 하나님보다 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오면 문제도 작아 보입니다.

낙담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내가 방금 만나고 나오는데 왜 내가 낙담합니까?

하나님이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이유를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알려주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된다고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다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고

우리가 자주 말하듯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무슨 슬픔이 있는지 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하면서 말을 많이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안겨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좋다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손에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받아낼 수 있는 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 손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계속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내 자신이 변해버립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하심과

그 긍휼하심에 나도 모르게 사람이 바뀌어 버리고

생각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가 하루 아침에 가볍게 여겨집니다.

나도 모르게 불평하던 입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골방의 기도를 통해 내가 변화됩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골방이 있습니까?

골방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 시키는 은혜의 샘터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공허함을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우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신하며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채우는 축복의 현장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어떤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골방의 장소와 시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