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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창32:11~32 새벽햇살의 은혜 본문

구약/창세기

창32:11~32 새벽햇살의 은혜

행복으로초대 2016. 11. 25. 17:10

새벽햇살의 은혜

(창세기 3211~ 32)

 

 

새벽햇살의 은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라

이 엘리야의 외침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 임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오랫동안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이라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마음이 푸근해지고 언제나 그리운 곳입니다. 고향에 가면 사랑하는 부모님도 형제들도 볼 수 있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분들이 있죠. 북녘이 고향이신 분. 임진각에서....

 

고향이라면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입니다.

야곱의 한쪽다리: 야곱은 자기 형 에서가 사병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자마두려움에 휩싸입니다. 20년 전, 야곱이 형 에서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건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원한을 풀지 않고 앙갚음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야곱이 본능적으로 한 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창세기 3211절에 야곱의 간절한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2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지금 제가 이렇게 읽어서 그렇지.... 하나님 살려주세요. ~~~~~~~

지금 속이 타는 거에요. 무서운 거에요. 에서가 쳐들어오면 막을 수도 없고, 자기의 처자식과 자기의 생명조차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역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잇는 믿음의 사람이구나.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믿음의 사람이구나.

 

야곱의 다른 한쪽 다리: 그런데,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이어지는 그의 태도를 보면 역시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 태도가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조금 전에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다시 그는 예물을 택합니다. 말이 예물이지 실제로는 뇌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에서의 손에서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한 후에 그가 한 일은 형 에서에게 뇌물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이 보낸 예물을 보면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면 주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형을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형의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인 방법을 씁니다.

 

<창세기 3213~15>

여러분! 야곱이 간절하게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뇌물을 준비하기 보다는 자신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큰 상처를 입었던 에서에게 죽을 각오하고 가서 무릎꿇고 빌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물로 형의 마음을 녹이려고 하는 야곱의 모습은 그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야금야금 형에게 보여주면서 형의 마음을 어떻게 하든지 녹이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간절했던 야곱의 기도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오늘 불행하게도 성도들이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합니다. 뜨겁게 찬양하고 예배드립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는 불인데... 세상에 부딪힐 때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뇌물로 표현되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냐는 것이죠?

 

이런 모습은 가나안에 입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오랜 광야생활을 거쳐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드디어 가나안에 정착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환경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본 목축하는 유목민입니다. 그리고 광야40년 동안 유목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바뀌어 가나안의 농경문화에 정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으니 농사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옆의 가나안 민족을 보니 얼마나 농사를 잘 짓고 농사가 잘 되는지.....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 식당은 장사가 안되서 똥파리만 날리는데 옆집 식당은 줄을 서도 40분씩 기다려야 될 만큼 장사가 잘 되요...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물어봤겠죠?

우리는 이렇게 농사가 안되는데 당신네들은 어떻게 그렇게 농사가 잘 됩니까? 도대체 비결이 뭡니까?” “~ 그거요. 우리가 믿는 바알신이 풍요의 신이고 비의 신입니다. 바알신이 적절하게 비를 내려주시고 농사가 잘 되도록 적절하게 도와주세요

여러분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른비와 늦은비를 시기적절하게 내려주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잘 살도록 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다리 신앙이 나타납니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바알신도 한번 섬겨볼까나? 성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한순간도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단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신도 섬기는 양다리를 걸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너희들이 나를 버렸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하나님도 필요해요! 예배도 드려요! 주일날이면 교회 말고는 다른데 가볼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문제가 생기면 그래도 기도하는 시늉이라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바알신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 말고 또 다른 세상적인 방법을 더 신뢰하는 양다리 신앙이 되지는 않는가 말이죠?

 

여러분~! 양다리 신앙인에게 어떤 내면의 고통이 일어나는 줄 압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에게서 2가지 내면의 고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찾아온 고통은 첫 번째 고통은 불안입니다.

 

22절에 보면 야곱이 밤에 일어나~” 왜 밤에 일어날까요? 불면증 걸려보신 분들은 알꺼에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잠을 자려고 하면, 별의별 생각이 다나요? 눈만 감으면 하나님께서 지혜의 은사를 막 부어주시는데... 낮에 그렇게 고민했던 것들이 막 풀려지고.... 좋은 아이디어들이 막 떠올라요... 결국 잠을 못 자는 거죠. 왜 생각이 많아질까요? 스트레스 받고 불안하니까 그런거죠! 그게 낮에는 생각 안나고 꼭 잠만 자려고 하면 생각나니, 미치는 거죠. 야곱의 불안을 볼까요? 나름대로 인간적인 최선의 방법을 동원했어요. 인생의 키를 자기가 지고는 하나님도 기도를 통해서 조치를 취해놓았고, 또 뇌물로 세상적인 조치를 취해놓았고, 다 대책을 세워 놓았지만 마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밤에 일어나~~~~”

 

두 번째로 야곱에게 찾아온 고통은 고독입니다.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그날밤 야곱은 에서의 위협으로부터 처자와 자식을 안전히 지키기 위해 가족을 다 떠나보내고 그 밤에 혼자 남습니다. 그렇게 20년 세월, 인생을 잘 영위해 볼 려고 애썼는데, 모든 것이 다 떠나가고 고독만 남았습니다. 야곱이 20년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압니까? 비겁한 놈, 치사한 인간이다. 사기꾼이다. 온갖 손가락질을 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룬 가정이고 재산인데... 결정적인 고통의 순간,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얍복 나루에 홀로 남은 야곱의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는 그런 분이 계십니까? 모든 것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아 고독의 고통 가운데 빠져있는 분들이 계시냐구요? 왜 하나님이 나를 저 초라한 얍복 강가로 나를 몰고 가시느냐 말이에요. 내가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데 저 허무한 얍복 강가로 몰려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저 허무한 얍복의 고독가운데 몰아놓고 그것을 즐기시는 분이십니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를 얍복 강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간단합니다.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얍복 강가에서 야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대면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시간,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할 시간이 야곱에게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얍복 강가의 불안과 고독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인간적인 수단과 잔꾀로 채워진 인생이었으나, 불안과 고독의 시간을 통해 오히려 인간적인 수단과 잔꾀를 다 비워버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대면의 시간,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얍복 강가의 불안과 고독으로 야곱을 이끄신 것입니다.

 

불안과 고독의 얍복 강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홀로 남아 고통하던 야곱에게 찾아가십니다. 24절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서 어떤 사람을 천사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성부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성육신하기 전의 성자 예수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뭐가 정답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분명한 것은 신적 권위를 가지고 그날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주변인으로 한발은 세상에 담그고 한발은 하나님께 담그고 인생의 주인노릇하며 살아가는 피곤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으로 설교를 많이 하시는데요. 그 래퍼토리가 주로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붙잡은 야곱! 그날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겁니다. - “복주세요. 살려주세요. 죽을 각오하고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복을 안주고는 못버티시더라.....복 줄 때까지 매달려보세요. ”이런 설교 많이 들어보셨죠? 이렇게 설교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내 인생의 키를 또 내가 잡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홀로 있는 야곱에게 다가가신 분은 하나님이에요. 야곱에게 씨름을 건 분도 하나님이세요. 야곱이 붙잡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붙잡았습니다. 그냥 불안과 고독의 홍수 속에서 떠내려가서 죽을 지경인 야곱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꽉 붙잡은 겁니다. 양다리 야곱의 인생에 주권적으로 찾아가시고 주권적으로 고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런 야곱의 양다리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치료하십니까?

 

1.야곱의 환도뼈를 치십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 할 때에 어긋났더라

 

불안하고 고독한 밤 야곱이 홀로 있는데, 야곱이 알지 못하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야곱을 찾아왔어요. 갑자기 씨름을 걸어요. 야곱의 성격을 아십니까? 야곱은 누구에게도 꺽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한순간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살아왔던 야곱입니다. 지는 걸 싫어합니다. 그러니 이번 씨름에서도 그의 성격대로 무조건 이겨야 됩니다. 지지 않으려고 죽을 각오로 버티고 있습니다. 야곱이 버티고 버티면서 완벽한 승리를 자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치십니다. 환도뼈가 어디냐 하면 엉덩이 아래쪽에 있는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쌍의 뼈라고 합니다. 환도뼈의 의미가 뭘까요? 지금 씨름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든지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티는 버팀목이 바로 환도뼈에요. 그 버팀목을 내려치시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야곱아! 네가 진짜 의지해야 할 분은 너의 버팀목 환도뼈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풀썩 주저앉아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27절을 볼까요?

 

2.새인생을 주십니다.

27절에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여기서 이름을 뜻하는 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호칭을 지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속성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빼앗는 자, 약탈자라는 뜻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실 때, 지금까지 야곱의 인생이 어떤 인생이었는지, 야곱 인생의 특징을 물으시는 거에요. 야곱이 대답하잖아요. “빼앗는 자입니다.” 여러분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멋진 이름이잖아요. 진취적이잖아요. 그럼요 빼앗으며 살아야지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죠.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피눈물을 흘려서라도 쟁취하며 살아야죠. 이런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던 야곱에게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면서 야곱의 인생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빼앗는 자라고 대답할 때, 아니야! 이제 그런 인생은 버려! 이제 새인생을 살아야지, 이제부터 야곱은 너의 옛인생이야! 다시는 돌아가지 말고 이제는 이스라엘로 살아야지!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28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이스라엘 이라는 뜻은 싸우다. 겨루다. 이런 뜻이 있구요. 다스리다 이런 뜻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이름에는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인생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얍복강의 씨름을 통해 야곱의 인생의 주인공이 드디어 바뀝니다. 온갖 잔꾀와 세상적인 수단에 밝았던 야곱, 자신의 인생의 키를 자신이 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야곱. 그런 그의 인생의 주인공이 드디어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양다리 중 세상에 걸치고 있는 한쪽 다리를 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다리 모두 하나님 편에 서도록 만드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인생,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생,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내 인생을 주도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시간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우리 심령의 환도뼈를 내려치시고 풀썩 주저앉아 당황해 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물어보시고 새인생을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오셨어요. 그리스도인이라는 허울좋은 타이틀 앞에 얼마나 세상적인 방법, 인간적인 잔꾀인 야곱을 의지하며 살아오셨느냐 말입니다.

 

야곱이 왜 이런 양다리신앙의 인생을 살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신앙과 신앙생활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신앙대로, 신앙생활은 신앙생활대로, 따로국밥처럼 살아가니까 양다리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이 신앙생활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말씀이 생활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 꼭 피드백, 되새김질을 하세요. 말씀이 그대로 생활로 이어지도록 말씀이 생활을 지배하도록 사세요. 기도를 간절히 하시면 기도를 통해 얻는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세요. 불안해하면 초조해하며 인간적인 잔꾀와 수단을 찾지 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선한 방법을 찾고자 영적 안테나를 바짝 올리세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믿고 세상은 세상방법대로 사는 양다리 신앙을 청산하세요. 기도하세요! 믿으세요! 승리하세요! 할렐루야!

 

야곱의 양다리 신앙을 청산케 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또 다른 멋진 일을 행하십니다.

하지만 야곱은 여전히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3. 새벽햇살의 은혜를 주십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비록 그가 의지했던 환도뼈가 꺽여 절뚝절뚝 저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불안과 고독의 고통의 밤이 지나고 따뜻한 새벽햇살아래 브니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흘리는 그 눈물이, 얍복강가에서 부르짖는 그 기도가 헛되지 않습니다. 그 눈물과 그 기도에 우리 하나님은 따뜻한 새벽햇살같은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양다리 신앙의 한 쪽 다리를 하나님께서는 내려치십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절뚝절뚝 절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새벽햇살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맞이 하십시오. 새벽햇살의 은혜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믿음의 여정가운데 양다리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