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창5:1~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본문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창세기 5장 1절~24절)
일상생활에서 ‘바쁘다’는 단어는 가장 자주 사용되는 말이 아닐까요? 현대인들 참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일이 있어 바쁜 건지, 마음이 바쁜 건지,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주위의 모두들, 바빠 죽을 지경이라며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별 볼 일이 없을 듯싶은 사람들도 바쁜 일상엔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홍수 심판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바쁜 세상 일 속에 파묻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도대체 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어떤 심정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았던 모세는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읽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런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 오셔야 합니다.
창세기 5장은 언약의 후손인 셋의 후손들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셋의 후손의 족보는 4장에 있는 가인의 후손의 족보와는 다릅니다. 가인의 후손의 족보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들의 족보는 다릅니다.
“○○는 ○○를 낳고 ○○를 낳은 후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년을 향수하고 죽었더라.”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 없는 자들, 즉 믿음이 없는 자들의 족보입니다.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흔적도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자들, 세상에서 많은 공적을 올렸고 유명했지만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인생들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셋의 후손은 태어남과 죽음이 분명합니다. 셋의 후손의 태어남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것이며, 죽음은 사명을 마치는 것을 말합니다. 셋의 후손은 자녀를 몇 년 동안 낳았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은 것이 뭐가 특별하냐고요? 여기서 자녀를 낳은 것은 믿음없이 타락해가는 세상에 믿음의 자녀들의 명맥을 이어가는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5장의 족보는 믿음의 사람 노아까지 연결됩니다. 한마디로 5장의 족보는 믿음의 사람들의 행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사람들의 행진 속에서도 도드라지게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에녹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21-23절)고 되어 있습니다. 셋의 후손들의 족보를 보면“지내며”의 삶과 “동행하며”의 삶 두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에녹 외에 다른 셋의 후손들은“지내며”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의 삶을‘하나님과의 동행’했다고 하고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삶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에녹에게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그냥 인생을 지내며 살아왔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까? 므두셀라를 낳은 후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를 낳기 전까지 65년의 인생은 그냥 ‘지내며’의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65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는 셋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녹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므두셀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삶에 내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의 삶에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하면서 새롭게 결단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에녹처럼 자녀의 출생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인생의 공허함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의 찾아온 어떤 만남, 어떤 사건을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만남과 그 사건을 당신의 인생의 므두셀라로 만드십시오.
그럼 왜 므두셀라가 에녹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었을까요?
므두셀라의 이름 뜻을 알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즉 므두셀라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는 하나님의 게시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므두셀라가 몇 살까지 살았죠? 969세입니다. 므두셀라가 969세가 되어 죽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십니까? 그 때가 노아 600세가 되던 해입니다. 노아 600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한 홍수심판이 있었던 때입니다. 에녹은 아들을 낳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 므두셀라를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했습니다. 또 죄악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므두셀라의 이름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므두셀라야~ 므두셀라야~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좋던 싫던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는 더욱 확산되어 갑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그 선포가 바로 므두셀라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다. 하지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와라.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받는 길이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에녹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봐, 요즘 에녹은 뭐한데?”
“에녹?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다던데, 에녹은 하나님 밖에 없잖아.”
“요즘 세상에 누가 하나님을 찾나? 하나님이 있기는 있나?”
“에녹은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다고 하던데. 아들 이름 지은 것 봐. 므두셀라잖아. 므두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대.”
“하나님의 심판? 글쎄?”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으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던데.”
“글세?”
사람들은 므두셀라의 이름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가볍게 생각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씀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죄악이 더 가득해 졌다고 합니다. 그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살았던 것이 물거품이었나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심판 속에서 구원받을 믿음의 가정을 남겼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사람들은 에녹을 조롱했을지 몰라도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얻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모든 사람들이 다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에녹의 가족들만큼은 목격을 했겠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동행하면 구원받는구나! 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렸을 겁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데 결국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을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면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노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로 이어지며 므두셀라의 메시지를 기억하고 준비하는 믿음의 가정이 된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을 보지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구원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영웅들 중, 에녹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5~6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에녹의 삶과 같습니까? 좀 어려웠나요? 많이 어려웠나요? 이해만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아!!!!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자! 이렇게 마음결정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함께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봅시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듯 순간순간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굉장히 외롭고 고독하고 즐거움도 없고 광야의 삶을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황량한 사막의 길을 주님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가는 재미없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엔조이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영적인 희열이 있고,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포근함이 있고, 위로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고독과의 전쟁이 아닙니다.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열정은 있었지만 쉽게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엔조이 하는 사람들은 그 즐거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기십시오.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한 비결은 바로 즐거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에녹이 뭔가 특별해서 그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65년의 세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을 살던 에녹의 인생에 강제적으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단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에녹이 하나님을 즐거워 했기 때문입니다. 에녹 300년 동행 인생은 하나님을 즐거워하,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즐기는 300년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은 재미를 못느끼는 거죠. 하나님의 그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예)게임하며 밤을 세는 학생들
예)나의 어릴 적 (중1) 겨울 방학 때, 기타 배우던 기억.
1주일간 계속 기타만 쳤다.
여러분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이제 나와 함께 걷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오늘도 해가 뜨자마자 동행을 했습니다. 매우 친밀한 교제, 대화, 하나됨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300년 쯤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보다는 내 집이 더 가깝구나. 나와 함께 가자.” 에녹은 그렇게 그냥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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