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창45:1~8 성도가 아는 것 본문

구약/창세기

창45:1~8 성도가 아는 것

행복으로초대 2016. 11. 25. 15:54

*주제:성도의 고백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입니다.

*제목: 성도가 아는 것

*우산질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성도가 확실히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왜 고난당하는 지 압니다.  (4절하~5절상)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요셉과 형제들의 재회 가운데, 실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다는 숨겨진 범죄입니다.

애굽 총리의 정체가 요셉이었음을 형제들이 알게 된 순간, 그들은 소름이 돋았을겁니다. 왜? 그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근심할 수 밖에 없고 한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판 일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른 것이죠.

 

우리가 잘 알듯이 요셉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은 애굽의 총리에 올랐지만 그 과정은 '고난'의 압축판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당한 배신, 자유를 빼앗긴 노예의 삶. 억울한 누명, 그리고 절대절망의 감옥생활, 술맡은 관원장의 꿈해석이 적중하면서 가졌던 해방의 꿈이 깨짐.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내 아들이 요셉과 같이 되게 해주소서."라고 한다면, 언뜻 좋아보이지만 실제로는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총리가 되는 것은 좋죠. 하지만 총리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안다면 쉽사리 요셉과 같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힘들겠죠.

 

고난은 우리에게 결코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고난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그래프가 항상 상향직선의 삶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오르막길도 있고, 정상에 있을 때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고, 저 어두컴컴한 깊은 골짜기에 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내게 내리막길이 있고 어두운 골짜기의 순간이 있어야 하는지, 즉 고난의 이유를 안다면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고난을 당했지만 그 속에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요셉. 그는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 큰일났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안심시켜 줍니다. 병원심방을 가보면 성도들에게 심방간 제가 오히려 힘을 얻고 올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계신데 뭐가 문제입니까?"

 

청년시절에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한 적이 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되는지, 원망해보기도 하고, 낙심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청년대학부 담당부장 집사님께서 심방을 오시면서 책 한 권을 주고 가셨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쓰신 '고통에도 뜻이 있다"라는 책이었습니다.

책을 펴보지도 않고 제목을 보는 순간, "위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하면 좋겠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고통이 오기전에 막

아주시는 하나님을 더 보고 싶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읽으라고 주신 책이니 책 한 장 한 장 읽다보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아마 그 때가 제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가장 고민하고 또한 기도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하고 있는 제 자신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성도는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겪는 것보다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을 겪는 것에 너무 집중하면 고난에 매여 여 넘어지고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집중하면 마치 퍼즐 하나 하나 맞춰지듯, 고난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고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난이라는 퍼즐을 맞추는데 첫번째 놓았던 퍼즐조각이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놓으며 완성된 그림을 보니 어느새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큰 그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은 성도의 삶에 있어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도라면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게 됩니다. 고난 중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왜 이곳에 있는 지 압니다.(5절하. 7절)

5절하)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절)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요셉이 노예로 팔리지 않고 아버지 집, 고향에서 계속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별의 아픔, 아버지된 야곱의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아픔.

하지만 요셉은 노예로 팔려 애굽이라고 하는 땅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땅, 평안의 땅, 부모의 보호가 있는 땅에 있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5절과 7절의 말씀을 통해 요셉이 가진 확실한 신앙의 고백을 발견해야 합니다.

 

첫번째는 보냄을 받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온 것이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먼저'입니다. 보냄을 받되, 특별히 구별되어 '먼저'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입니다.

세번째는 보냄의 목적입니다. 5절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7절"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을 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곳이 애굽입니다. 편안히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현재 요셉은 애굽에 있습니다. 애굽에도 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그의 현재 진행형인 지금 내가 서있는 곳에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 곳에 있는가? 지금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확실히 알고 매일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냄 받은 애굽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생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공간이 어디입니까?

그 곳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곳에 여러분을 파송했음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것도 남들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자리에 먼저 보내셨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한 구원의 목적을 두고 보내셨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성도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환경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참 좋아아는 성경 구절 중 하나.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혹시 암송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초능력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아닙니다.

12절에 보시면, 비천에 처할 때, 풍부에 처할 때, 배부를 때, 배고플 때 자족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자족하는 비결입니다.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에서 3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가난한 초막집에 살아도 부유한 궁궐같은 집에 살아도 성도는 환경에 따라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성도는 장소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명에 따라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을 때에도, 감옥에서 죄수로 있을 때에도, 총리의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도 항상 자신에게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을겁니다. 보디발의 집에 있을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총리의 자리에 있을 때나 그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노예로, 죄수로 있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삶을 포기하고 더 악해지든지 더 비참해 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노예의 자리나, 죄수의 자리나, 총리의 자리나 변하지 않고 동일합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내가 왜 여기 있을까?를 생각했고 그 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리가 지금 초막집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궁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든지, 이 질문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요셉의 답을 참고하십시오. 내가 서 있는 이 곳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그것도 특별히 보내셨고, 분명한 구원의 목적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보내셨다. 그리고 그 답을 따라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실히 압니다. (8절)

8절)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삼으셨나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기승전O" 이라는 말 있습니다. 기승전결에 모든 결론은 땡땡이다.

요즘시대 같으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기승전 최순실" "기승전 박근혜" 이런거죠. 

요셉이 확실히 알았던 것,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이 확실히 알고 고백하는 것. 바로 "기승전 하나님"입니다.

8절의 시작은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즉 결론은 뭐라구요. 결론은 하나님입니다. 

문장으로 만들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일들은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고 팔려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고 뜻대로 안되니 누명을 씌우고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가고 .... 등등 여차여차해서 결국 총리가 되었다. 그런데 뭐? 결국 모든 일들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죽고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이 불안해서 요셉에게 선처를 구할 때, 요셉이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는 이 고백을 합니다.   

창50장20절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결국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형님들이 저를 해하려고 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롬 8장28절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결론은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 하시고,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 성도의 고백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이십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가 모든 일 가운데 확실히 알아야 할 세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왜 고난을 당하는 지 아는 성도, 둘째, 왜 이 곳에 있는 지 아는 성도, 셋째,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실히 아는 성도입니다.  

고난이 있을지라도. 나의 생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확실한 고백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