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마태복음1:18-20 성탄을 맞이하는 좋은 마음밭2 - 성령으로. 본문
마태복음1:18-25 성탄을 맞이하는 좋은 마음밭2 - 성령으로.
성탄을 맞이하는 좋은 마음밭 두번째입니다.
우리모두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을 따라
'성령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믿습니까?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인 이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실 때,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먼저 성령으로 잉태되심에 담긴 중요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오실
여자의 후손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최초로 드러나는 말씀이기 때문에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한 아기가 태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단과 마귀의 머리를 완전히 밟아 승리하실
'여자의 후손' 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죄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 잡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탄생은 남자를 통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의 탄생에는 인간의 어떤 힘도 어떤 능력도
어떤 개입도 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
어떤 일이 있기 전에 일어났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이 동거하기 전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약혼을 하고 대개 1년 정도의 약혼 상태로 지냅니다.
1년의 기간이 지나면 정식으로 결혼하고 나서 동거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약혼은 했으나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거는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에
인간의 생육방식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하셨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야만 예언된 여자의 후손이 되십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은 성령으로만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답이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으로' 되도록 하셨습니다.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는 성령으로 베푸는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성령을 힙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의 사역도 '주의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것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일이 성령으로 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 자신 조차도 '성령으로' 에 자신을 묶으셨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좋은 마음밭이 어떤 마음인가? 할 때,
성령으로 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오직 성령으로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얻은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난 삶에도 역시 '성령으로'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좋은 마음밭.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령으로 살지 않는 사람에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는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입니다.
19절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을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소식을 접하고는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간음함으로 임신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리아와 파혼을 하려 했습니다.
"끊고자 하여"라고 해서 어떤 분들은
요셉이 예수님을 낙태시키려 했다고 생각하던데, 아닙니다.
결혼을 파혼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로운 결정을 따라 마리아의 임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를 뜨겁게 사랑하기도 했고,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거나 처벌을 하려고 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움이 좋아보입니까? 맞습니까? 네 맞아 보입니다.
요셉은 참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꼭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해야 합니다.
1)마리아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결혼도 안한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불러 올 것이고,
약혼기간에 있던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마리아는 큰 위험에 처합니다.
신명기 22장 21절에는 혼전임신을 한 여성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를 아버지 집 문 앞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이다."
라는 율법대로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래서 19절 말씀대로 요셉이 마리아와의 결혼을 파혼하면
상당한 문제가 생깁니다. 요셉이 파혼하려는 순간은,
즉 20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이 순간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죄악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막고 물거품이 되게 하려는 순간입니다.
2)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다.
20절에 천사가 요셉을 어떻게 부릅니까?
"다윗의 자손아 요셉아~"라고 부릅니다.
왜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 없습니다.
꼭 다윗의 자손이어야 했고 그래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죠.
그런데 다윗의 자손 요셉은 분명히 의로운 사람이라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구원사역을 망치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오히려 방해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로운 사람 좋습니까? 싫습니까?
불의한 사람보다 좋습니다.
예수님도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 좋은 뜻입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 요셉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를 막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좋은 말일까요?
요셉은 분명 의로운 사람이나, 자기의 의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가 최고입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의로움으로 결정하고 자기의 의로움으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없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합니다.
성령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의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이 옳으면 의로운 것입니까?
요셉의 생각에는 마리아와 파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큰 죄를 짓습니다.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위대한 계획을 방해하고
무너뜨리려는 가장 큰 죄인이 되려고 합니다.
20절에 다시,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하지만
요셉이 생각하는 이 순간은 인간의 영원을 좌우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구원의 일에, 세상에 엄청난 혼란을 주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 의가 충만하면 혼란이 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세워야 합니다.
군대에서 많이 했죠? 군대에서만 했습니까?
저보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학교에서 교련수업도 했잖아요?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을 지목하면서 '기준'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손을 들고 '기준'이라고 크게 소리지르면,
그 한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질서정연하게 줄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왜? 내가 기준할래! 하면서 저 사람도 기준!
저기서도 기준! 저기서도 기준! 저마다 다 자기가 기준이라고 하면,
엉망진창이 되죠. 질서가 다 깨지고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베드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만큼 베드로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자기 생각이 옳다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막아서려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베드로가 잘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한 선생님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 살이가 너무 힘들어 잘못된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잘못된 선택,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그럼, 여러분이 그 선생님의 제자라면 그 순간을 봤을 때,
"선생님, 잘 뛰어내리세요. 선생님 화이팅!"이런 제자가 있습니까?
"선생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선생님 진정하세요"이렇게 할거잖아요.
스승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는데,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이건 당연한 도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
고 하실 정도로 책망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자기의 의로, 자기 생각으로만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계속 책망을 듣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도, 또다시 칼을 빼들고
말고라고 하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리면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해 싸워줄 사람.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기준에 자기 생각에 자기 의로움으로 하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대로 살았던 사울은
자신의 신념과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다가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성령으로 살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의롭다 해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성령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성적, 합리적인 삶을 내려놓으십시오.
이성과 합리에 따라 내 생각이 옳다는 편견을 내려놓으십시오.
내 생각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내 감정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내 경험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내가 배운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내 정욕과 탐심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내 머리속으로 이해되고 내 이성적으로 계산되는 일은 내 일입니다.
내 뜻을 따라가면 내 일이고 내 실력이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요셉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의로움을 따라 율법대로 일이 되면 이렇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자기 생각으로 의롭다.
자기 경험대로 의롭다.
자기 배움대로 의롭다하면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그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실 때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음을 따라 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힘을 빼십니다.
인도할 때 그냥 따라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할 때 잘 따라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잘 따라가야 되는데, 꼭 맞아야 갑니다.
내 경험 내려놓고, 내 생각 내려놓고, 내 이성과 합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을 이루려는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
다시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알리시고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니 생각에 이해되는대로,
니 감정이 올라오는대로 결정하지 말고
니가 경험한대로 행동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대로 해라!
20절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다시 한번 더 이 모든 일들이 '성령으로' 된 하나님의 일임을 듣고
깨닫게 된 요셉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24절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절입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아기의 이름도 예수라 지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의 가장 대표적인 행동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이 말씀이 요셉이 성령으로 사는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은 사람을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그 구원의 과정 속에 한 사람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요셉에서
성령으로 사는 삶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사건,
성탄이 이루어지기까지 믿음과 순종의 삶,
성령으로 삶으로 변화된 요셉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다시 돌아가십시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성령으로' 이끄심을 받는 삶으로 돌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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