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온전한 성도1 : 자기사랑보다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 디모데후서 3장 1절~5절 본문
온전한 성도1-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성도.
(디모데후서 3장 1절-5절)
온전한 성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 3장은 한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결승점이 마지막에 있듯이 3장의 목표도 마지막 17절에 있겠죠?
17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
즉 3장의 목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하다? 한글사전을 찾아보니 "(무엇이)변화되지 않고 본 바탕대로 고스란하다."입니다.
하지만 성경본문의 원어적 의미로는 "적합한" "준비된"의 의미입니다.
17절에 '온전하게 하며'와 '갖추게 하려함이라'는 실제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에
적합하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준비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성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1절에 보시면 "말세"라는 단어가 보이십니까?
우리가 말세라고 하면 큰 사건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
'말세다 말세다'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지구가 곧 종말할 것처럼 생각을 많이 하시는데,
여기서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세가 어떤 때라고 합니까? 고통하는 때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견디기 힘든' '혹독한' '어려운'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만났던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두 사람에게 쓰여졌던 말입니다.
그만큼 '사납다' '무섭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1절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너는 이것을 알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듣는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즉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믿음을 훼방하는 것을 견디기 힘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사납고 무서운 때가 말세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세의 시대가 고통스러운 때라고 했을까요?
그 답을 2절에 주고 있습니다.
2절에 빠져있는 말이 있는데요.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세가 믿음을 지키며 살기 참 힘든 때인데
왜냐하면 2~5절까지 나오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2절부터 5절까지인데 이것때문에 온전한 성도로 준비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적합한 성도가 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2~5절까지 말세의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19가지입니다.
1.자기를 사랑한다. 2.돈을 사랑한다. 3.자랑한다. 4.교만하다. 5.비방한다. 6.부모를 거역한다.
7.감사하지 않는다. 8.거룩하지 않다. 9.무정하다. 10.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11. 모함한다.
12.절제하지 않는다. 13.사납다. 14.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15.배신한다. 16.조급하다.
17.자만하다. 18.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사랑한다.
19.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다. 또는 없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진 온전한 성도로 살기 어려운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땅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다르게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칠게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친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기 싫고 맹수들에게 잡혀 먹히기 싫고
여기저기 부딪치며 아프기 싫어서 그냥 흐르는 강물 방향대로 흘러가버린다면
연어는 새끼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 맞춰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를 위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에 적합하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준비된 온전한 성도되어야 하는 데,
그렇게 사는 것을 참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사는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이게 아닌가요?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는데 나혼자 반대쪽으로 향해야 할 때,
이것이 우리에게는 고통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냥 세상 사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뭐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믿음생활하려고 하나?
그냥 편하게 하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 때, 여러분에게 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성도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5절 마지막 입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온전한 성도는 19가지 세상 사람들의 모습에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돌아서라는 말을 그대로 풀면 '멀리 떨어져서 회전하라'입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 떨어져라.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시선을 그들을 향해 두지 말고 방향을 바르게 바꿔라 입니다.
그럼 방향을 어디로 바꿔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만 시선을 두라는 말입니다.
19가지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서
오직 하나님께 방향을 맞추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시편 1편에 복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1절을 혹시 외우십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2~5절 19가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동사에 집중해 보십시오.
따른다. 선다. 앉는다. 따른다~~~ 선다~~~ 앉는다~~~
하지만 복있는 사람은 그 방향을 따라 가지 않습니다.
다 그리로 갈지라도 그런 사람들에서 멀리 떨어져서
돌아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기 사랑 VS 하나님 사랑
19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입니다.
실제로 19가지 모습이지만 2절에 "자기 사랑"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돈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자기 자랑하게 되고
자기를 사랑하니까 교만하고 자만하여 자기를 높이려합니다.
자신를 사랑하니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비방하고 모함하고 사나워지고 배신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자기는 잘 먹고 잘 살아도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지 않고 은혜를 모릅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감사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자기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하니 거룩하지 않고 절제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기 사랑의 극치인 이기주의와 무정함.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니까 배려하기 보다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원통해 하고 분을 풀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니까 자신만 잘 되면 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결국 19가지 말세의 사람들의 죄악된 모습은
우리에게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외쳤던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와 같습니다.
사실 이 선택은 아담과 하와 시절부터
오늘을 사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내려오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사랑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여전히 자기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이기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어려움입니다.
바라기는 이제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을 이긴 성도를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성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성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렇기에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기에 준비되고
적합한 온전한 성도는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을 이기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찬양이 여러분의 진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4절에 보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자기 사랑이 서로 맞서는데,
자기 사랑을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사랑을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하나님 사랑도 다른 무엇인가로 바꿀 수 있을 듯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쾌락이 아닌 무엇일까요? 쾌락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희락'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았을 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며 탐스러운게게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을 향한 끝없는 욕구와 갈증에 목이 탑니다.
세상은 우리 눈에 보기에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맛없는 음식과 매력적이지 않은 이성은 유혹하지 못한다고.
모든 유혹은 '재미'가 있어야 통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할만큼 충분히 재미가 있습니다.
돈버는 재미, 명예의 재미, 권력의 재미, 쾌락의 재미.. 어디 그뿐입니까.
운동, 오락 , 여행 그리고 TV 연속극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재미들이 우리 주위엔 엄청 많습니다.
요즘엔 인터넷이 워낙 발달되어 있어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시간보낼 수 있습니다.
정말 이 세상, 재미위주로 산다면 밑도 끝도 없이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재미를 찾는 사람은 고통은 피합니다.
재미없는 일들, 힘들고 어렵고 심각한 일들은 자연히 외면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멸시하거나 애써 못본 체 합니다.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재미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재미없어 죽겠다 ' '어디 재미있는 일 좀 없나'
그들은 재미있는 일을 위해 한 평생 벌어온 돈을 걸 수도 있고,
금보다 귀한 시간을 다 쓸 수도 있습니다. 재미만 있다면,
그리고 그 욕구만 채워진다면 그들은 한 생명도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
쾌락(fun)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닷물을 마시는 거와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 부추깁니다.
그에 비해,
재미가 아닌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쾌락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즐거움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들입니다.
아기 낳는 일이 어디 신이 나서 하는겁니까?
심한 고통과 흠뻑 젖는 땀방울이 재미있는 일입니까?
하지만, 그래야만 , 그렇게 해야만 거기서 생명이 태어나지 않습니까?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 신비..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의미가 있기에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기쁨은 쾌락(fun)이 아닙니다.
그건 쾌락이라 하지 않고 희락( chara, joy)이라 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인 희락입니다.
인생 항로에 고통이 90%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배기 희락, 기쁨은 그 고통 속에 담겨있다고 합니다.
고통의 껍질을 깨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통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희락임을 알게 됩니다.
온전한 성도는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자기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이기는 사람은 세상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을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락을 추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 1문
-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에 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 쾌락보다 하나님을 더 즐거워하는 것이 온전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9가지 죄악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반대로 생각해 보고
그렇게 떠오른 것들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즐거워하십시오.
세상과 반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때로는 세상에서 바보로 사는 것을 즐기십시오.
사람들은 나를 바보로 볼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아는 성도들입니다.
땅속에 가장 귀한 보화가 묻힌 것을 알기에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가격을 땅주인이 불러도
그 땅을 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땅 주인은 저 바보 그러겠죠?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좁은 길의 마지막 종착지를 알기에 기뻐하며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단 작은 일부터 시작합시다.
여러분이 즐기는 많은 재미거리와 취미 등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에 속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즐기고 재밌어 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과 연결할 수 있을까요?
전혀 취미활동이나 여가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기뻐하실 일들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즐거워하는 성도가 온전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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