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이런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 디모데후서 1장 1절~5절 본문
이런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말씀:디모데후서 1:1-5
제가 지난 두 번의 수요예배 때, 디모데후서 3장을 설교했다가 이왕 시작한 거, 디모데후서를 해야겠다 싶어 디모데후서 1장부터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처음엔 디모데후서가 어떤 책인지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으로써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두번 투옥되었는데 첫번째가 A.D. 62-63년경이었습니다. 그후 석방 되어 마게도냐 지방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중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라는 첫번째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A.D. 63년경이었습니다. 그후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로마제국에 A.D. 64년 7월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비난을 모면하고자 이 화재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바울은 또다시 체포되어 두 번째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때가 A.D. 66-67년경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썼고 이 서신을 보낸 후, 얼마 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울서신은 13개의 서신이 있고 그 중에서 목회서신으로 구분되는 것이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공적인 성격이 강하고 반면에 디모데후서는 개인적인 편지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바울 사도가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 대한 개인적인 권면과 격려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상황과 간증 등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목회서신들이 교리적인 부분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면 본 서신은 생활 속에서 겪게 될 실제적인 부분들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디모데가 복음 때문에 겪게 될 핍박과 고난 등을 예고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 내지는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모른다는 착잡한 마음속에서 디모데에 대한 애뜻한 사랑을 전하다 보니 디모데를 수없이 위로하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1절~2절 : 바울의 인사말
3절~5절 :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애틋한 그리움.
누군가를 정말 간절히 보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단순히 호기심으로 연예인이나 유명인 보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애틋한 사랑으로 정말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 말입니다. 저는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말 안해도 아시겠죠?
3~5절까지를 자세히 보면, 각 절마다 바울이 생각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3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생각은 “너를 생각하여”입니다. 물론 너는 디모데를 말합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2절에 보듯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육적인 아들은 아니지만 바울이 믿음 안에서 낳은 영적인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으로 낳은 영적인 아들로서 사랑했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4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생각은 “네 눈물을 생각하여”입니다. 여기에도 ‘너’는 디모데입니다. 그럼 바울이 생각하는 곳 있는 것은 ‘디모데의 눈물’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떠나지 않는 디모데의 모습이 하나 있는데 바로 ‘디모데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사도행전 20장 37절에 보시면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작별할 때, 서로 부둥켜 안고 크게 슬퍼하며 울었던 그때의 눈물로 봅니다.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가슴 아파하며 울었던 디모데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5절에 보시면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너’는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볼 때면 항상 생각하고 있던 것이 ‘디모데는 참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야~라는 것입니다. 그런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볼 때마다 바울은 디모데 때문에 기쁨이 가득하게 되니 더 보고싶은 겁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고대 헬라시대, 연극 무대에 선 배우들의 꾸민 모습과 연기를 말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배우들처럼 자기 진짜 모습은 감추고 변장해서 연기하듯 위선적인 모습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디모데는 신앙과 그 행위에 있어서 언제나 변치않고 진실된 모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울은 참 좋아했고 정말 보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유난스럽게 디모데야 보고싶다. 보고싶다 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4장 9절을 보면,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9절에 보면, 디모데를 향해 속히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11절을 바울과 함께 있었던 데마, 그레스게, 디도 같은 사람들이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신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것? 바울은 그것보다 배신의 아픔이 더 큰 것이죠? 거짓믿음이 드러난 자들에게 받은 상처가 큰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 지금 가장 보고 싶은 게 뭘까요? 거짓이 없는 믿음. 그리고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디모데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런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디모데같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아버지처럼, 아들같은 관계를 가진 사람.
애틋한 사랑을 가진 눈물의 사람,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진실된 믿음의 사람. 이런 사람이 보고싶습니다.
우리 호산나교회 모든 성도들 관계가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과 관계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도 서로 피한방울 안 섞였죠? 물론 좀 섞인 분들 계시겠지만요. 하지만 주 안에 우린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교회는 한 가족이라는 말을 실감을 못했는데, 한 번 아프고나더니 확실히 알겠다고 하더라구요. 멀리 있는 자식들 보다 낫다. 얼마나 챙겨주는지, 목사님, 교회는 확실히 한 가족이에요. 그러니 서로를 생각할 때, 진실된 마음과 눈물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죠.
그런데 이 본문을 계속 묵상하다보면 디모데는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듯 애틋하게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니, 행복하지 않습니까? 물론 자신도 바울을 정말 사랑했고 보고 싶어했지만 이렇게 자신을 보고싶어하는 애틋한 편지를 받아보면 어떨까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퍼주는 사람의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 같은 사람의 모습이 보고 싶어 집니다.
3절에 보면, 정말 이런 사람이 우리 호산나교회에 가득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3절,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꼭 생각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디모데였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에 기도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어떤 중보기도자의 기도 수첩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 분은 5대양 6대주를 기도로 다니세요. 저기 아프리카에서 시작해서 유럽갔다가 중앙아시아에서 아랍으로 아랍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동남아로 오세아니아로 갔다가 북미 남미 그리고 북한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와서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영적지도자들을 위해, 섬기는 교회를 위해,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 교회안에 연약한 성도들, 기도가 필요한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자기 기도. 그렇게 하면 자기 기도할 수있을까요? 없을까요? 못해요. 시간없어요. 그렇게 기도하려먼.
그런데도 걱정 안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내 사정 다 알 줄로 압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고 털고 일어나요. 생각해보세요.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을 위해, 만난 적도 없는 그 곳의 한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선교사님이 한국의 한 귀퉁이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지 알까요? 모르죠. 하지만 기도는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영적 관심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열심으로 변화되고 먼 곳의 어느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기도의 영토를 넓히십시오. 여러분의 관심의 시선을 멀리 가져보십시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옮겨보십시오.
예전에 신학대학원 때 친하게 지냈던 형님이 한 분 계십니다. 형님이라고 하니까 꼭 조폭같네요.
중국분이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목회를 하러 가셨습니다. 함께 학교생활 할 때, 항상 형! 중국 가더라도 형을 위해 평생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엄청난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약속에 매여 기도할 때, 꼭 그 이름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 형은 모를 겁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지. 사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죠. 한국과 중국, 먼 곳이죠. 하지만 그 형이 중국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의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관심입니다. 그래서 떨어져 있고, 언제 다시 만날 기약도 없지만 기도합니다. 중국에 있는 친했던 형님에 대한 저의 관심이 저를 중보기도자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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