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창4:16~26 찬양2-찬양은 하나님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본문
지난 시간에 찬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찬양이란?
1.하나님을 극찬하는 것이다.
2.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3.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3가지 찬양에 대한 정의를 말씀드릴 때,
여러분이 생각하는 찬양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찬양은 노래인데, 음정과 박자, 악기의 음악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있음을 눈치채셔야 합니다.
찬양을 말할 때 노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고 찬양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래를 못 한다고 찬양을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저를 부끄럽게 했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때는 소풍을 가면 한 명씩 나오게 해서 장기자랑을 했습니다.
주로 노래를 부른다든지, 춤을 췄습니다.
저는 노래 좀 한다고 소문이 나서 장기자랑하면 언제나 1번이었고
반대표로 나가 노래 불렀던 때입니다.
장기자랑을 하는데 함께 SFC운동원.
옛날에는 SFC 사이다 환타 콜라 라고 불렀는데요
SFC는 STUDENT For CHRIST의 줄임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학생. 다른 말로 학생신앙운동원입니다.
함께 SFC 학생신앙운동하던 친구가 앞에 나와 우쭐우쭐 하더니
'일일송정 푸른 솔은 흘러흘러 갔~어도'
아이들이 일제히 우~~~~~~~~ 하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문제는 그 친구 바로 앞 순서로 제가 멋지게 인기가요 한곡 뽑고
아이들의 환호성을 받고 난 후 였던 겁니다.
뭘 좀 아는 친구들이 야!!! 창태야 너도 교회다니잖아 가곡 불러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일일송정 다 못부르고 강제로 끌려내려온 그 친구에게
"야~" 라고 하니까 그 친구가 제게
"아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할걸 그랬네"이랬습니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시 인기 가수들 노래 잘 부르고
락이나 메탈음악 좋아하고 장기자랑에서 한껏 노래 실력 자랑했던
저를 부끄럽게 했던 사건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석기시대 이야기처럼 들릴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세상 가요부르지 말고
찬양으로 너희 믿음을 보여라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쨍쨍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성경 최초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는 책.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을 기록한 책.
그런데 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가 찬양이 아닙니다.
당연히 최초의 노래는 찬양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입에서 당연히 불려져야 할 노래는 찬양인데
찬양은 부르지 않고 지금 한창 유행하는 트로트가,
아이돌 가수들 노래만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위대하신 능력, 우리를 구원하신 희생과 죽으심을
찬양하지 않고, 남녀의 허무한 사랑, 삐뚤어진 성과 동성애, 불륜,
분노와 폭력을 노래하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공식적 최초의 노래는 라멕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다른 이름은 칼의 노래 라고 합니다.
분노를 가득 담은 노래입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노래입니다.
살인을 했는데 그것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는 책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입니다.
이후에 찬양, 찬송이라는 말은 언제 나올까요?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수치를 가려준 셈을 축복하며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할 때 찬송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의 자녀가 부를 찬양보다
분노와 복수 살인의 노래가 먼저 나오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노래가 찬양이 아니라니!~!~~~~~~~~~!
라멕이 부른 노래는 라멕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라멕의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가면 중요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입니다.
가인으로 부터 시작되어 결국 라멕이라고 하는
분노와 복수 살인의 노래를 자랑스럽게 부르는
무서운 한 인간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찬양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반드시 분노와 복수의 세대,
살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폭력의 세대가 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 모두 깨어납시다. 우리 모두의 삶이 찬양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늘 찬양하는 삶으로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라멕은 열매입니다.
분노하는 라멕
복수하는 라멕
살인을 노래하는 라멕은 눈에 보이는 열매입니다.
그 악한 열매, 악한 노래를 맺히도록 하는 뿌리는 가인입니다.
가인의 인생이 라멕같은 악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인과 비교해 보아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2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그런데 셋이 낳은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가인의 후손은 살인을 노래하고 분노와 복수의 노래를 불렀지만
셋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멀리 생각하지 말고 당장 저와 여러분,
우리의 자녀가 살인을 노래하는 자녀가 되기 원하십니까?
복수를 다짐하고 이를 갈고 늘 분노하는 악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찬양하는 자녀들이 되길 원한다면,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찬양으로 하나님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라멕의 노래는 16절에서 시작됩니다.
16절에 가인이 어떤 사람인지 한 눈에 보게 합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그 벌로 하나님은 가인이 유리 방황하게 하셨으나
가인의 생명 만큼은 철저히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뿌리쳤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가인의 인생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지키심을 거부하는 인생.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성을 쌓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변의 수많은 원수들에게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원수들의 공격을 당하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싸우고 다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은 한번도 자녀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자녀들과 후손들은 하나님으로 멀어집니다.
18절을 읽어보면, 가인의 아들 에녹 이후의 후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후손들의 이름이 나올수록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특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해줍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간 곳이 어디입니까? 놋 이라는 땅입니다.
놋이라는 방황,방랑, 슬픔, 애통 이라는 말입니다.
가인이 떠난 땅은 에덴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쁨을 떠났다.
하나님의 기쁨에서 멀어졌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에서 멀어지니
세상에서 기쁨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당연히 슬픔과 애통 속에 삽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가는 곳은 방황입니다.
왜 외롭습니까? 왜 허전해할까요?
왜 여기저기 기쁨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지만
마음 붙이지 못하고 방황합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방황하게 되어있습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 우리 후손들이 왜 방황할까요?
왜 외로워하고 왜 삶에 허전함을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으로 채울까요?
그 열매는 결국 지금 나에게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까요?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치열한 삶을 살면서 분노하고 또 분노하는 삶.
복수의 칼을 갈면서 부르는 노래가 그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어떤 뿌려졌을 때,
그 씨앗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요? 결국 라멕의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설령 원수와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했습니다.
때로는 가인이 먼저 남을 공격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약탈했습니다.
승리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곳은 놋입니다.
다시 방황하고 슬픔과 애통, 성공했지만 허전하고 외롭고.. 마음 둘 곳없어
다시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적의 복수를 불안해 하고 잠못 이루는 삶?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셋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셋이 누구일까요?
셋은 아벨에 대한 보상입니다.
들판에서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가인의 보상입니다.
즉, 성경에서는 가인을 순교자로 부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자.
하나님께서 향기롭다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그가 아벨입니다.
셋은 아벨의 보상이니, 셋은 아벨과 같습니다.
셋에게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을 낳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말씀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셋이라고 하는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 셋이라는 씨앗에서 곧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치고 망울이 맺히고 꽃이 피어나게 하십니다.
그 아름다운 꽃송이가 에노스라는 아들이요
그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찬양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셋이 어떤 노래를 불렀을 지,
그 열매로 알게 됩니다. 찬양입니다.
비록 첫번째 노래가 찬양이 되도록 하는
그 중요한 사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사명을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게 씨앗을 뿌리심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찬양으로 하나님의 씨앗을 뿌립시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비참함을 기억하십시오.
분노와 복수, 살인의 노래 칼의 노래를 멈추십시오.
하나님을 떠나서 갈 곳은 방황입니다. 슬픔과 애통입니다.
외로움과 허전함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승리해도
그 어느 곳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기쁨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그 사람이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찬양2 - 찬양으로 자녀들에게 믿음의 씨를 뿌립시다.
지난 시간에 찬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찬양이란?
1.하나님을 극찬하는 것이다.
2.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3.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3가지 찬양에 대한 정의를 말씀드릴 때,
여러분이 생각하는 찬양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찬양은 노래인데, 음정과 박자, 악기의 음악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있음을 눈치채셔야 합니다.
찬양을 말할 때 노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고 찬양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래를 못 한다고 찬양을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저를 부끄럽게 했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때는 소풍을 가면 한 명씩 나오게 해서 장기자랑을 했습니다.
주로 노래를 부른다든지, 춤을 췄습니다.
저는 노래 좀 한다고 소문이 나서 장기자랑하면 언제나 1번이었고
반대표로 나가 노래 불렀던 때입니다.
장기자랑을 하는데 함께 SFC운동원.
옛날에는 SFC 사이다 환타 콜라 라고 불렀는데요
SFC는 STUDENT For CHRIST의 줄임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학생. 다른 말로 학생신앙운동원입니다.
함께 SFC 학생신앙운동하던 친구가 앞에 나와 우쭐우쭐 하더니
'일일송정 푸른 솔은 흘러흘러 갔~어도'
아이들이 일제히 우~~~~~~~~ 하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문제는 그 친구 바로 앞 순서로 제가 멋지게 인기가요 한곡 뽑고
아이들의 환호성을 받고 난 후 였던 겁니다.
뭘 좀 아는 친구들이 야!!! 창태야 너도 교회다니잖아 가곡 불러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일일송정 다 못부르고 강제로 끌려내려온 그 친구에게
"야~" 라고 하니까 그 친구가 제게
"아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할걸 그랬네"이랬습니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시 인기 가수들 노래 잘 부르고
락이나 메탈음악 좋아하고 장기자랑에서 한껏 노래 실력 자랑했던
저를 부끄럽게 했던 사건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석기시대 이야기처럼 들릴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세상 가요부르지 말고
찬양으로 너희 믿음을 보여라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쨍쨍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성경 최초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는 책.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을 기록한 책.
그런데 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가 찬양이 아닙니다.
당연히 최초의 노래는 찬양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입에서 당연히 불려져야 할 노래는 찬양인데
찬양은 부르지 않고 지금 한창 유행하는 트로트가,
아이돌 가수들 노래만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위대하신 능력, 우리를 구원하신 희생과 죽으심을
찬양하지 않고, 남녀의 허무한 사랑, 삐뚤어진 성과 동성애, 불륜,
분노와 폭력을 노래하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공식적 최초의 노래는 라멕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다른 이름은 칼의 노래 라고 합니다.
분노를 가득 담은 노래입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노래입니다.
살인을 했는데 그것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는 책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노래입니다.
이후에 찬양, 찬송이라는 말은 언제 나올까요?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수치를 가려준 셈을 축복하며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할 때 찬송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의 자녀가 부를 찬양보다
분노와 복수 살인의 노래가 먼저 나오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노래가 찬양이 아니라니!~!~~~~~~~~~!
라멕이 부른 노래는 라멕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라멕의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가면 중요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입니다.
가인으로 부터 시작되어 결국 라멕이라고 하는
분노와 복수 살인의 노래를 자랑스럽게 부르는
무서운 한 인간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찬양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반드시 분노와 복수의 세대,
살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폭력의 세대가 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 모두 깨어납시다. 우리 모두의 삶이 찬양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늘 찬양하는 삶으로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라멕은 열매입니다.
분노하는 라멕
복수하는 라멕
살인을 노래하는 라멕은 눈에 보이는 열매입니다.
그 악한 열매, 악한 노래를 맺히도록 하는 뿌리는 가인입니다.
가인의 인생이 라멕같은 악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인과 비교해 보아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2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그런데 셋이 낳은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가인의 후손은 살인을 노래하고 분노와 복수의 노래를 불렀지만
셋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멀리 생각하지 말고 당장 저와 여러분,
우리의 자녀가 살인을 노래하는 자녀가 되기 원하십니까?
복수를 다짐하고 이를 갈고 늘 분노하는 악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찬양하는 자녀들이 되길 원한다면,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찬양으로 하나님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라멕의 노래는 16절에서 시작됩니다.
16절에 가인이 어떤 사람인지 한 눈에 보게 합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그 벌로 하나님은 가인이 유리 방황하게 하셨으나
가인의 생명 만큼은 철저히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뿌리쳤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선택했습니다.
가인의 인생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지키심을 거부하는 인생.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성을 쌓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변의 수많은 원수들에게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원수들의 공격을 당하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싸우고 다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은 한번도 자녀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자녀들과 후손들은 하나님으로 멀어집니다.
18절을 읽어보면, 가인의 아들 에녹 이후의 후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후손들의 이름이 나올수록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특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성경은 분명히 말해줍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간 곳이 어디입니까? 놋 이라는 땅입니다.
놋이라는 방황,방랑, 슬픔, 애통 이라는 말입니다.
가인이 떠난 땅은 에덴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쁨을 떠났다.
하나님의 기쁨에서 멀어졌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에서 멀어지니
세상에서 기쁨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당연히 슬픔과 애통 속에 삽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가는 곳은 방황입니다.
왜 외롭습니까? 왜 허전해할까요?
왜 여기저기 기쁨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지만
마음 붙이지 못하고 방황합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방황하게 되어있습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 우리 후손들이 왜 방황할까요?
왜 외로워하고 왜 삶에 허전함을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으로 채울까요?
그 열매는 결국 지금 나에게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까요?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치열한 삶을 살면서 분노하고 또 분노하는 삶.
복수의 칼을 갈면서 부르는 노래가 그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어떤 뿌려졌을 때,
그 씨앗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요? 결국 라멕의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설령 원수와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했습니다.
때로는 가인이 먼저 남을 공격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약탈했습니다.
승리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곳은 놋입니다.
다시 방황하고 슬픔과 애통, 성공했지만 허전하고 외롭고.. 마음 둘 곳없어
다시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적의 복수를 불안해 하고 잠못 이루는 삶?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셋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셋이 누구일까요?
셋은 아벨에 대한 보상입니다.
들판에서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가인의 보상입니다.
즉, 성경에서는 가인을 순교자로 부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자.
하나님께서 향기롭다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그가 아벨입니다.
셋은 아벨의 보상이니, 셋은 아벨과 같습니다.
셋에게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을 낳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씨앗을 말씀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셋이라고 하는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 셋이라는 씨앗에서 곧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치고 망울이 맺히고 꽃이 피어나게 하십니다.
그 아름다운 꽃송이가 에노스라는 아들이요
그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찬양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셋이 어떤 노래를 불렀을 지,
그 열매로 알게 됩니다. 찬양입니다.
비록 첫번째 노래가 찬양이 되도록 하는
그 중요한 사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사명을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게 씨앗을 뿌리심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찬양으로 하나님의 씨앗을 뿌립시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비참함을 기억하십시오.
분노와 복수, 살인의 노래 칼의 노래를 멈추십시오.
하나님을 떠나서 갈 곳은 방황입니다. 슬픔과 애통입니다.
외로움과 허전함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승리해도
그 어느 곳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기쁨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그 사람이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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