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창13:5~13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리라 본문
<도입>
아카시아 꽃잎 - 좋아한다. 안좋아한다. 좋아한다. 안좋아한다.....뭐하는 걸까요?
손에 침뱉어서 침이 튀는 걸 보고 방향 결정.... 뭐하는 걸까요?
어느 것을 좋을까요? 하나님 한테 물어봅시다.... 뭐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가르쳐주는 건가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인가요?
오늘 본문은 성도가 중요한 결단을 할 때에
선택의 기준을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자주 소개 됩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서 각각 소유가 많아지자
목자들끼리 우물과 초장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어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롯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마치 에덴동산과 같은 땅,
하지만 죄악의 땅 소돔을 선택하여 결국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께 맡기고 선택권을 롯에게 넘겼고,
외적 조건으로는 척박한 가나안 땅에 남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눈에 보이는 모습대로만 판단하지 말고
죄악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선택해야 복을 받습니다.
자 여러분~~
이런 설명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조금더 깊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알기를 원합니다.
롯은 선택을 잘못했는가?
롯은 우상 숭배가 만연한 갈대아 땅에서 삼촌인 아브람을 따라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 길 소원한 자였습니다.
부친이 죽고 없어서 할 수 없어 따라나섰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는 세상적으로 번영했던 갈대아에 남기를 선택하지 않고
험한 길을 택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에
그 형편을 살피러 온 하나님의 천사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롯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무법한 자의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벧전2:7)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롯이 과연 선택을 잘못 했을까요?
그는 판단을 정확하게 했고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라.
이 지역에서는 수입이 3천만원인데 저 지역에서 6천만원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고 사회적인 신분이 낮아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처럼 현실에서 풍부에 처하든 궁핍에 빠지든
그 심령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바로 서 있으면 됩니다.
롯이 땅을 선택한 실제적인 근거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양 떼를 잘 키워서 번식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물과 풀이 풍부한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의 선택은 아주 합당했었습니다.
신자라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도깨비 방망이 뚝딱 식으로 다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찬양과 기도에만 전무하여 언제나 은혜 받은 표정을 지으며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의 온갖 자질구레하고 복잡한 일들과 씨름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아주 힘든 싸움입니다.
또 그런 힘든 싸움을 언제 어디서든 잘 감당하고 승리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야 말 것이라는 온전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자질구레한 싸움을 잘하기 위해선
신자도 현실적인 기술, 지식, 신용, 예절 등에서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앞서도록 최선의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또 실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롯의 잘못은?
성도는 죄악의 땅을 멀리해선 안 됩니다.
죄악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죄의 힘을 쉽게 이길 자는 드물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변화시키려 들어선 안 됩니다.
신자 본인은 악은 모양이라도 멀리해야 합니다.(살전5:22)
대신에 신자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에 의지할 수 있기에
죄악의 땅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악의 땅을 변화시키는 일은
기도로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여야 하고
본인은 최소한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롯이 잘못한 일은 소돔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소돔 땅에 들어가 의인답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자기 삶으로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사실은 롯이 처음부터
소돔 땅을 덥석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요단 온 들을 택했습니다.
그러다 차츰 시일이 흘러 소돔 땅으로 옮겨 갔습니다.(11,12절)
그리고 소돔을 멸하시기 전이라고 했으므로
소돔 자체도 죄악이 완전히 관영하기 전이었을 수 있습니다.(10절)
따라서 땅을 선택할 때만 해도
그는 소돔에 갈 의향이 없다가
점차 들판 보다는 평지 성읍의 생활을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소돔 땅에 들어가서도 그 땅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 땅의 죄악과 타협하거나 눈 감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선택을 잘했는가?
그렇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선택한 것일까요?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0절)
무슨 뜻인가?
아브람이 선택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겠다는 것은
좌우 어느 쪽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롯이 끝까지 삼촌에게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
가나안을 고집했더라면
아브람은 소돔 땅에 갈 수밖에 없었고 또 갈 용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스스로 아무 선택을 하지 않은 대신에 선택권 자체를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그 땅에 물이 많고 적고에 연연하지 않고
어느 땅이든 기꺼이 가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척박하지만 죄가 적은 가나안 땅에만 하나님이 있고
물이 많지만 죄 많은 소돔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도 아니요
물론 그 반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
본문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뜻을 미리 분별하여 그 뜻대로 순종한 일은 없습니다.
반면에 온전한 믿음으로 행한 일은 있습니다.
외면적으로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그 선택을 완전히 위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광야도 옥토로 변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옥토도 광야로 변한다는 것만은 철저하게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잘 분별할 수 있었는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가 이전에 겪었던 처절한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도착한 초기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점차 광야의 장막 생활에 싫증나기 시작했고
또 기근이 닥치자 물과 식량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12:7-10)
그런데 애굽에 가까이 가자 아름다운 아내 사래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염려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서 사래와 공모하기를 애굽 사람들한테 아내 대신 여동생이라고 속이기로 했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뺏어가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예상한 대로 사래는 애굽 왕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어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아브람은 아내를 되찾고
또 많은 은금을 얻어 소유도 더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은 전혀 묻지 않은 채 도덕적으로 말도 안 되는 치사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비겁한 아브람을 끝까지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당신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떠난 적이 한 시도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당시의 최고 강국인 갈대아 우르에서
편안하고 화려한 도시 생활을 즐겼던 자입니다.
비유컨대 인생의 황금시절을 온갖 재미를 만끽하며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세상 모든 재미를 다 버리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서 화전민이 되어 이곳저곳 유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이 땅은 잠시 지나갈 곳이요
영원한 거처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가나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며 옮겨 다니되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어떤 기근이 닥쳐도
반석에 생수를 내어서라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모든 열방들에게
자기가 체험한 그런 여호와의 복을 나눠주는 근원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브람은 광야 생활에 조금씩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체면 때문에라도 떠나온 갈대아 우르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당시 갈대아와 맞먹는 대도시 애굽에 흥미가 슬슬 동했습니다.
성경은 기근이 오기도 전인데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방은 지금 네게브 사막인데 그야말로 물이 없는 광야로
가나안 보다 훨씬 척박한 곳입니다.
기근이 오기 전인데도 그런 곳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본심이 애굽으로 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침 울고 싶던 차에 누가 뺨을 때려 준다고 기근이 닥쳤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시험하려 기근을 보낸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애굽으로 지체 없이 넘어갔습니다.
성경은 “애굽에 거류하려 하여”(창12;10) 넘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근 동안에만 피신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우거는 그 땅에 시민권은 없지만 영속적으로 머물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여차하면 애굽에서 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봐선 최초로 믿음의 백성으로 세운 자가
완전히 당신의 뜻을 배반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다시 붙들어 세웠습니다.
음부에 내려가도 하늘에 올라가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다시 그 품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반드시 당신의 지팡이로 안위하셔서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못하게 하십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그 은혜를 정말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물이 적고 척박한 곳에만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땅 같이 당신을 모르는 죄악의 땅에서도
자기를 보호해 주신 그분을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좌든 우든, 물과 풀이 적은 가나안 땅이든 풍부한 요단 들판이든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리라고
담대하게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점쟁이가 아닙니다.
신자들은 자꾸만 좌로 갈까요 우로 갈까요 물으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따르겠다는 선한 순종의 의사와 각오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솔직히 하나님이 좌로 보낼지 우로 보낼지에 그 방향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을 점쟁이로 대우하는 셈입니다.
좌우 어느 쪽인지 방향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어느 쪽이 성공 가능성이 많은가, 어느 쪽이 형통하겠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님이 물과 풀을 풍부하게 주실지만 알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만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따르는 것은 뒷전입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의 뜻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구체적인 방향에 관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에 관심을 두는 것과
하나님이 나에게 정작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릅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혜를 안 주실 리가 있는가?
좌로 가든 우로 가든 하나님이 떠날 리도 없고
보호해 주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느 쪽으로 인도하실지 또 어떤 은혜를 주실지 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의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두가지 신앙의 모습
1.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슨 일을 시키든
순종할 각오와 헌신이 완전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분의 뜻을 묻는 것
2.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순종하겠다는 것은 천양지차 입니다.
1은 우로 가든 좌로 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도만 해주시면 그에 맞게 준비하고 반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좌우의 선택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성실하게 충성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반면에 2는 여전히 좌우가 문제입니다.
자기가 선택하기 힘드니까 하나님더러 선택해 달라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마음에 안 들면 순종하는 것을 재고해 볼 수도 있다는 주저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은 더욱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좌우든 무조건 따르겠다고 하는 자에게만 좌우 중에 하나를 보여줄 뿐입니다.
아브람은 좌가 되던 우가 되던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쪽으로 인도하던 그 쪽으로 가겠다는 차원조차 넘었습니다.
그에게 방향은 이미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좌우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자기도 그분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순종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자에게 방향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자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가 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먼저 되어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란 택함을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영원한 기뻐하심에 이미 들어간 자입니다.
신자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가, 전 삶이, 전 인생이
하나님이 당신의 것으로 채워주셔서 완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기만 소원하면 됩니다.
신자가 가는 길이 좌우가 될지 결정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어떤 일을 할지를 책임져 준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물 좋은 곳만 찾는 신자들
롯은 자기 나름대로 분명히 합당한 선택을 했습니다.
신자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가 없다면
객관적인 조건이 좋아 보이는 곳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선택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바도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롯도 아브람과 똑 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1,12절)
그도 도시생활에 미련을 못 버리기는 아브람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지 성읍들 즉 작은 도시에서 생활을 하다가
점차 가장 큰 성읍 소돔까지 옮겨갔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는 처음부터 죄악의 땅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물과 풀이 풍부한 요단 온 들을 택했습니다.
또 그런 선택을 했을지라도 그 들판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절대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광야의 장막 생활에 싫증이 나서
사람들이 이뤄놓은 문명을 즐기려 도시 생활을 찾아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 앞에 서있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 사람의 하나로 서있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좌우를 선택한 것이 그의 운명을 가른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그를 멸망으로 이끈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람도 동일한 잘못을 범했지만
기근으로 인한 애굽 피신에서 겪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롯과 땅을 나누고 헤어지는 일이 생겼는데,
하나님은 신자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신자의 신자 됨 즉, 그 중심을 먼저 보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낀 직후라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선 이젠 어느 땅에 가든 하나님만 함께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한 것이다.
만약에 정말로 하나님이 좌하라고 했다면 물론 아브람은 끝까지 좌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런 일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나아가 그는 현실적으로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닥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언제 어디서든 상대더러 먼저 선택하라고
담대하게 양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입니다.
주님의 권능과 은혜를 진실로 확신하는 자는
현실의 삶에서 얼마든지 담대하게 여유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법입니다.
반면에 롯은 어떠했는가?
아직 그의 인생관을 바꿀만한 고난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일찍 여원 아픔은 있었지만
그럴수록 삼촌 아브람을 아버지 대신에 따랐습니다.
지금껏 그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일대일의 개인적인 교제가 없었다.
삼촌이 가자고 하면 가고 있자고 하면 있었습니다.
지금도 먼저 선택하라고 하니 선택한 것뿐입니다.
몸은 비록 가나안 광야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광야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삼촌 아브람에게(인간), 들판의 물과 풀에(물질),
나아가 도시의 문명 혜택(주위 여건)에만 자기 안전과 만족을 걸었습니다.
아브람도 애굽으로 문명의 혜택을 찾아 나섰지만
문명이 자기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지켜주심을 체험했습니다.
화려한 도시에나 황량한 광야에서나 동일한 하나님이 계심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에 기근을 비롯하여 온갖 고난을 허락한 이유가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런 소망을 키우기에는 광야에서의 나그네 생활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어디에 물과 풀이 풍부할지를
하나님에게 물어 답을 얻는 능력을 믿음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물이 많고 적음에 그저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이
매순간 바로 곁에서 동행하고 있음을
언제 어디서든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이미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좌우 중에 어디로 가야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좌우 중에 어느 쪽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될까 고민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디로 가야 자기에게 유리할까 저울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제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식의 믿음이 작용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좌든 우든 자기가 먼저 혹은 유리한 쪽을 선택해야 불안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성경대로 서로 관용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식이나 배우자가 또 직장 동료가 조금이라도 눈에 어긋나면
용서는 뒷전이고 당장에 판단하여 정죄합니다.
좌와 우 둘 중에 자기는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고
그들은 롯처럼 죄악의 땅을 선택한 양 몰아부칩니다.
설령 다른 사람이 고의로 소돔 땅을 택했다 하더라도
신자는 그래선 안 됩니다.
진짜 아브람처럼 좌든 우든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자식이 잘못해도, 배우자가 마음에 거슬려도,
회사 직원이 손해를 끼쳐도,
교회 성도가 죄를 지었어도, 좌우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그들이 잘못했다면 하나님이 그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만약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사건 뒤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縱)과 횡(橫)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13:14-18)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남게 되자
하나님은 그의 후손이 수도 없이 많아지고
또 보이는 땅을 다 차지할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다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주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가나안 땅을 선택했더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좌든 우든 어디로 가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한 것뿐 입니다.
신자가 종으로 가든 횡으로 행하든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데 그 땅을 차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는가?
신자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그 계시대로 잘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에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신령한 신자는 거의 없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담대하게 서 있으면,
그가 겪는 어떤 일에서나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승리케 해주십니다.
신자는 좌로 가야할지 우로 가야할지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서나 신자답게 살면서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를 통해 증거되기를
전 존재와 삶과 일생을 걸고 소원하면 됩니다.
요컨대 자기 목숨이 없어지더라도,
즉 맞바꾸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의 흑암의 세력들 앞에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해주시겠는가 말입니다.
또 그런 사람에게 좌든 우든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 종과 횡을 행할 때에 어떤 악한 세력이 감히 틈탈 수 있겠는가?
위대한 신앙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런 자가 신자이자 신자가 가진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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