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요한복음 8:12~20 예수님은 누구신가2-세상의 빛 본문
요한복음 8:12~20 예수님은 누구신가2-세상의 빛
에고 에이미 라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고 에이미 라는 말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지난 주일에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구신가?
두번째 시간,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선포함으로
인생의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생명의 빛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선포와 설명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포하실 때는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친절히 설득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참과 거짓 논쟁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그들의 인생에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2절에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나를 따르는 자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우리에게 선포하시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시고 선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선포하실 때
우리 인생의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짖눌렀던 모든 어둠의 결박은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세상의 것에 포로된 사람들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눈 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며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빛이신 예수님 앞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특징 첫번째,
1)인생의 참 뜻을 알고 삽니다.
12절을 자세히 보시면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빛과 어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이란 무엇일까요?
태양일까요? 달과 별일까요?
이 자리를 환하게 비추는 전기 조명일까요?
이 빛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그럼 어둠에 다닌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캄캄한 밤 중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걷는다는 말은 아니겠죠?
시각장애가 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참소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어둠에 다니는 것은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1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인생의 참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참 뜻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시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예수 밖에 없으니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니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에
안내표지판을 듣고, 예수님이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고 외치는
사람이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눈의 기능이 상실된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것도 기적이지만
인생의 참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참 뜻을 알고 그 뜻에 인생을 바치는 것,
그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어떤 직장 여성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동료들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신앙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으로 목사님에게 찾아갔습니다.
상담하는 중에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등불을 둡니까?”
“우리는 어두운 곳에 등불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직장에 배치하신 것은
그렇게 어두운 곳에 생명의 빛을 비추라고 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몇주 후 다른 여성들과 함께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목사님, 이 분은 오늘 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 분은 우리 직장에서 13번째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신 분입니다.”
그녀가 어두운 세상을 탓하는 않고 생명의 빛을 발하는 동안
그 직장은 그만큼 밝아진 것이다.
어둠의 직장이지만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런 기적같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주께서 원하시는 기적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특징. 두번째,
2)판단의 돌이 아닌 생명의 디딤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초막절과 관련있고, 물을 붓고 등을 켜는 행사와 관련이 있지만
사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고 하면, 총독만이 할 수 있는 사형선고를 했으니
로마 정부에 대해서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해 주라고 하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참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땅에 무슨 글자를 쓰시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듣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무섭게 돌을 들고 여자를 죽이려던 사람들은 다 떠나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빠졌던 간음한 여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십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다시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예수님, 그리고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장소로 가겠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서 예수님께로 와서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이 빛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빛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여자를 돌로 치려고 했던 사람들은 빛이 아닙니다.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빛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보다 죄를 조금 덜 지은 것은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보다 조금 덜 음란한 것을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보다 조금 덜 어두운 것을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덜 어두울 뿐, 어둠은 같은 어둠입니다.
캄캄한 곳에 들어가면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둠이 익숙해지면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본다고 합니다 .
어둠에 있으면서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왜 보지 못하느냐고 판단합니다.
돌을 들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던 사람들도
어둠입니다. 어둠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는 말씀의 빛이 비취니까
"나는 어둠이구나! 나도 죄인이구나! 나도 음란하구나! 나도 더럽구나!"
판단의 돌을 든 사람들이 어둠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판단의 돌을 들고 던지는 게 너무 익숙한데,
조금 덜 어두울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보다 죄를 더 많이
더 크게 지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죄가 사라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빵가게 주인과 버터공장 주인 사이에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빵가게 주인이 공급받은 버터를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버터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가 버터공장 주인을 고발했던 것입니다.
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소?"라고 하자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안다는거요?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럼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 거요?
그 버터공장 주인이 "우리는 늘 저 빵가게 주인한테서 사옵니다?"
결국 버터의 양이 줄어든 이유는
제빵업자의 빵이 줄었기 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세상이 잘못됨이 나 때문임이 아닌지,
교회에 말썽이 생기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닌지,
교회의 어떤 부서가 잘 안되는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아무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 판단하지 않으실까요?
판단하면 죽음이지만
판단하지 않으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덕분에 생명의 빛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생명 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삶의 길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판단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디딤돌이 됩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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