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마태복음5:21-26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16아름다운 예배자1-분노와 화목 본문
마태복음5:21-26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16
아름다운 예배자1-분노와 화목
설교를 시작하면서 아프리카의 두 나라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르완다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 두 종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벨기에가 이 나라를 지배했는데,
한 종족은 노예로 한 종족은 지배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독립을 합니다.
이 때 노예로 있었던 종족이 일어나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을 노예로 부렸던 종족에게 보복을 하였습니다.
1994년까지 무려 1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학살과 보복을 당한 종족은 총으로 무장한 반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차별 게릴라전을 펼쳐서 새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새 정부를 수립한 이들은 반대 종족을 무려 300만 명이나 죽였습니다.
르완다는 이와 같은 분노로 인해 굶주림과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또 다른 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입니다.
이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자연환경이 좋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독립을 시킨 후에도 백인들이 계속 정권을 잡고 휘둘렀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라 해서,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정책으로
백인들은 흑인들을 억압했고 흑인들은 자기들의 땅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흑인들은 데모를 했고 자신들의 인권을 외쳤습니다.
백인들은 권력과 총과 힘으로 흑인들을 계속 억압했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이 감옥에 가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흑인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게 되어
그들의 힘으로 흑인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그 사람이 넬슨 만델라입니다.
넬슨 만델라도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을 하다가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자 전 세계가 걱정했습니다.
분노가 폭발하여 피의 보복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화해와 용서를 외쳤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마음속에 분노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고문하고 평생 감옥에서 살게 했는데 왜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분노가 있었지만 그는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의 화해와 용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계속적인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습니다.
분노한 르완다는 죽음의 땅이 되고
화해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평화의 땅이 되었습니다.
분노와 화해는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오늘 말씀은 살인과 분노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살인과 분노의 세상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을 보내고
분노가 아닌 화해로 하나님의 나라를 반석위에 세우도록 하십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예배자입니다.
이제부터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1.더 나은 그리스도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 외적인 행동 )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은 ( 내적인 마음 )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은 어떻든 외적인 행동으로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미워하든, 분노의 마음을 품고 있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만 하지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킨 것이니 자기가 의롭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훨씬 수준 높은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살인이라는 외적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분노,
악한 말로 욕하고 저주하는 것까지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법적인 차원에서 ‘살인’하지 않은 것으로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누군가를 향해 마음에 분노하지 않았는가?
누군가를 향해 악한 말로 욕하지 않았는가?
마음 속으로 저주하고 비난, 비판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살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일까요?
대소변이 더럽죠.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죠?
제 첫 조카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아직 결혼도 안한 총각이었지만 조카 기저귀를 많이 갈아줬거든요.
그런데 한번은 기저귀를 갈고 있는데,
또 똥을 싸서 손에 묻고 소변이 튀어서 얼굴에 막 묻고 .....
그런데 그게 더럽지가 않은거에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손자 기저귀 갈아주고
손자 엉덩이에 입방구로 뿌우우우 하고
아이고 좋아라~하시는 게 이해가 되요.
어린 아기들이 어떤 위험한 걸 만지거나 입에 물려고 하면
어른들이 다 그럽니다. 어이구~~안돼 지지 지지야~
어릴 때, 돈이 가장 더럽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손 때를 얼마나 많이 타는 줄 알아~?
세균이 득실득실 거리는 거라고.
돈이 가장 더럽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레미야 17:9-10을 보십시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
즉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더러운 죄의 동기들.
사람을 몇번이나 죽이고 싶은 미움의 마음들.
하나님은 그 마음들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마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누구를 정말 죽일만큼 미워했다면
살인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요한일서 3: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그래서 우리는 외적 행동이 아닌
내적인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 밖에 없고,
마음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숨겨진 자신의 마음속까지 회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입니다.
2.죄의 열매와 죄의 뿌리
죄의 본질을 깨달아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형제를 대하여 노하는 자
악의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남을 해하려고 노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며 욕하는 자
‘라가’는 바보, 머리가 텅빈 멍청이 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단순한 미련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비난과 저주입니다.
분노를 다스리고 욕설과 비난과 저주를 멈추지 않으면
‘살인’하는 것입니다.
살인, 욕설, 비난과 저주는 죄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열매의 문제가 아니라 뿌리의 문제입니다.
죄의 뿌리(본질)가 무엇일까요? 살인의 뿌리는 분노입니다.
욕설과 비난과 저주의 뿌리도 분노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분노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이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라는 마음과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계속 죄의 열매는 맺히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부부 사이의 대화 : 저 여자가.
죄인된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 가인의 생각: 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서 내 마음대로,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가지고 싶은 대로 합니다.
하나님처럼 섬김을 받고 싶어하고 섬김받고
높임받는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니 내가 항상 옳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안되니 분노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다가 결국 살인하게 됩니다.
(다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
”내가 하나님이다!“가 죄의 본질이라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원하는 대로 막무가내로 하는 분이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면 어떻게 할까요?
3.아름다운 예배자
분노의 문제를 예배의 문제로 다룹니다.
23-24절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화의 문제입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 예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25-26절은 교회가 아닌 세상 속에서 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입니다.
재판을 하더라도 원한과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충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이건 밖이건 아름다운 예배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마음대로 하셨나요? 하고 싶은 대로 하셨나요?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 결정판이 십자가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죄인을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
그것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과 멸시의 소리, 그리고 견디기 힘든 육체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분노로 반응하지 않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분노로 맞부딪쳐 욕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음흉한 미소로 쳐다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예수님은 당연히 그렇게 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셔야 하나요?
에수님을 참 많이 닮은 스데반 집사님도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현장에서, 무서운 눈으로 돌을 들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왜 무섭지 않았을까요?
왜 아프지 않을까요?
왜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왜 화가 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분노가 아닌 화목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다면,
조금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전에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서
제 호가 바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바보처럼 살자. 늘 바보처럼 웃고, 허허허 웃자.
사람들이 저 바보 그래도 그래! 바보처럼 살아서 교회를 살리자!
그런데 바보처럼 살다보면 많이 아픕니다.
마음도 몸도 많이 아픕니다.
그래서 가끔씩 바보 그만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얼마전 어떤 성도님이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별명 하나 지어주고 싶어요."
"네~별명이죠. 좋죠."
"바다. 바다같은 목사님~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바다처럼 삽시다"
온 몸이 전율했습니다. "그래 바다가 되자~"
예수님은 그렇게 바다가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화나는 일도, 분노하고 비난하고 저주할 일도 다 받으시고
화목케 하셨습니다.
분노의 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죄인처럼 낮아지신 것입니다.
죄의 형벌 속에 자신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사랑이며,
용서이며, 이해와 화목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예배자는
분노를 가지고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욕설과 비난과 저주를 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 이해와 화목을 이룬 사람이
아름다운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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