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마태복음5:17-20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14-더 의로운 사람 본문
마태복음5:17-20 반석위에 세운 하나님 나라14-더 의로운 사람
좌우앞뒤로 인사합시다. '냉수 한 그릇' 이 됩시다.
지난 주일 말씀 기억나십니까? 냉수 한 그릇같은 성도들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합시다.
한번 더 인사합니다. "함께 하니 행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상당히 어렵고 약간 수업하는 분위기 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느낌이 안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거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꿈도 꾸지 마라~ 이런 느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설문조사를 이렇게 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중에 단 두 명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두사람이 누가 될까? 바리새인과 서기관.
이렇게 두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이 사람들은 성경,
즉 율법에 통달한 사람이고, 율법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며
율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을 잘 때까지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생활을 합니다.
시편1편의 복있는 사람에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말씀의 인격화, 제가 늘 말씀드렸던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이것을 그대로 이루어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충격 그 자체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만큼 신앙생활에 힘쓰라는 의미.
성도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워낙 안 좋은 이미지,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열심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문루디아(성덕스님) / 8남매 무당-붕어빵 전도왕 이야기>
둘째.그럼에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없다?
둘 중에 무엇일까요? 있다.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처럼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바뀌어야 한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여기서....
1.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
율법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세가 받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토라'라고 해서
모세오경,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가 있습니다.
이 토라에 대한 주석, 해설이 있겠죠?
문자로나 구전으로 전승된 주석을 미드라쉬, 미쉬나 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쉬나 주석에 대해 주석과 해설을 보충한 것을 '게마라'라고 하고
미쉬나+게마라를 합친 것을, 여러분이 잘 아는 '탈무드' 라고 합니다.
이렇게 미드라쉬, 미쉬나, 게마라, 탈무드 같은 주석.
세부적인 규정과 규칙들을 장로들의 전통, 또는 유전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볼께요. 십계명의 제 4계명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 계명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일까?
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일이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일하는 것일까?
이런 것을 다 규정과 규칙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키라고만 하셨는데,
사람이 만든 이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율법,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만든 것이 613가지의 율법이 되었습니다.
248가지 하라 + 365가지 하지말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13가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의롭다고 했고
특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2.율법의 파괴자 예수인가? 율법의 완성자 예수인가?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프다고 안식일에 밀 이삭을 까서 먹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에 의하면 타작, 즉 노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쳤습니다.
이것 또한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켰던 율법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람의 규정과 규칙입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은 사라졌습니다.
율법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은 사라졌습니다.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읽지 못하고,
자신들도 지키기 어려운 규정과 규칙들만 잔뜩 만들었습니다.
본질을 변질시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본질로 돌이키려는 예수님과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례 수십 가지를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은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이 일이 된다고 해서
그럼 무거운 것, 그 무게가 어느 정도까지 인가?
무화과 하나의 무게를 손에 드는 것까지는 일에 해당되지 않고
그것보다 더 무거운 물건을 들면 일하는 것은 일이 되고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배가 고파요. 뭐라도 먹어야 겠는데 식은 밥이 있어요.
식은 밥을 먹으면 죄가 아니고, 식은 밥을 데워서 먹으면 죄가 됩니다.
또 안식일에 2,000규빗 이상을 걸어가면
여행하는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2,000규빗은 1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입니다.
무화과 하나를 드는 것과 2,000규빗 걸어가는 것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는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규정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만든 이 규정을 잘 지키며 살았는가?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실생활에 적용해보니 너무 어렵거든요.
그래서 교묘하게 변질시킵니다.
사람들이 안식일에는 2000규빗 이상 걸어 다니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예를 들어 5,000규빗 되는 거리를 갈 일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1,800규빗을 걸어간 다음 앉아서 쉽니다.
아직까지는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조금 있다가 새로 시작해서 1,800규빗을 걸어갑니다.
이것도 2,000규빗이 안 되니까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조금 쉬었다가 나머지를 걸어가면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도 5,000규빗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쉬나가 가르치는 율법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뭐라고 하죠?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담겨진 참된 본질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통과 규칙들로 율법을 변질시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파괴자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17절)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다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18절)
19절에서 율법의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3.더 의로운 사람은 율법의 형식을 뛰어넘어
본질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 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20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은 쳤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웃을 향한 정의감은 있었지만
사랑이 없는 율법의 글자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위선, 겉으로만 신앙, 형식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고 몸부림쳤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은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본질을 붙드는 사람이 더 의로운 사람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를 함께 지고 예수님을 따르자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로마서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의 십자가로 초청하십니다.
십자가로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보내
세상 사람들을 십자가로 초청하십니다.
율법의 형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율법성도와 복음성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율법성도는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하지만,
복음성도는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합니다.
율법성도는 죄의 빚을 갚으라고 하지만,
복음성도는 이미 죄값은 지불했다고 합니다.
율법성도는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지만
복음성도는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 줍니다.
율법성도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칭찬 듣고 상 받기를 원하지만
복음성도는 주님처럼 허리에 수건 두르고 병들고 나약한 이들의 발을 씻겨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율법성도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이렇게도 강도높게 책망하셨을까요?
회칠한 무덤이 뭡니까?
공동묘지를 가보십시오. 잘 꾸며진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아무리 잘 꾸며봐도 무덤은 무덤입니다.
무덤안에는 죽은 자의 뼈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 죽음 밖에 없고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은
죄는 드러낼 수 있어도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정의는 외칠 수 있지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주행축제>
주 사랑. 행복 나눔 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사랑으로
세상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선물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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