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디모데후서완료 - 사명자를 지키시는 하나님 (디모데후서 4장 14절~22절) 본문

신약/디모데후서 완료

디모데후서완료 - 사명자를 지키시는 하나님 (디모데후서 4장 14절~22절)

행복으로초대 2017. 7. 26. 18:29

사명자를 지키시는 하나님 디모데후서 414~22

 

오늘은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지막에는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꼭 기억하고 꼭 지켰으면 하는 말, 하지 않으면 후회될 말을 합니다. 디모데후서를 마무리하면서 바울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19절부터 22절까지 보시면 바울서신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문안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고싶었던 사람들, 고마웠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인사합니다. 그리고 이 문안인사 바로 앞에 있는 14~18절까지의 말씀이 실제로는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말입니다. 이 마지막 말에 바울은 무엇을 담았을까요?

 

먼저 14~18절까지는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사건은 바울의 입장에서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던 문제입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사건>

14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등장합니다.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정확한 정보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지 못하지만 그가 바울과 교회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알렉산더가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까? 해를 많이 끼친 사람입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행위와 말로써 바울과 교회에 해를 많이 끼친 사람입니다. 15절에 보니 주의대상이었으며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특별히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심한 방해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 알렉산더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은 복음의 대적자인 알렉산더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내가 당한만큼 돌려줘야지 하면서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을수도 있는데 역시 바울은 그런 단계를 뛰어넘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에 대해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여러분 요셉과 형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와서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옛날 요셉을 애굽에 팔았던 일로 복수하지 말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요셉이 이 때 했던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이 말을 선용하십시오. 창세기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을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나 정말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욕을 쏟아붓고 악담을 하고 저주를 쏟아붓고 싶을 만큼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의 자리에 서지 마시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용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복수한다고,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겠다고 허송세월, 악한 세월 보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계속 들어보십시오.

 

<두 번째 사건>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여기서 변명하다는 말은 법정적 용어입니다.

고소를 받고 자신에 대해 변호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자신을 스스로 변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바울과 함께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다 바울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바울을 위한 변호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 숭배가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교회의 박해가 극심했던 때에 바울을 변호한다는 것은 신변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 곁에서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십자가를 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스데반의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버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아무도 그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누가 그의 곁에 있었습니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당시 재판에서는 피고의 동료들이 함께 재판정에 나와서 피고를 위해 변호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곁에 자신을 변호해줄 인간 동료는 없었지만 비교할 수도 없는 주님께서 자신의 곁에 서서 자신을 변호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곁에 든든히 서 계신 주님! 그리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에서 쓰였던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바울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주님이 함께 옆에 서 계셔서 변호해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재판 가운데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큰 힘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곁에서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 허물을 돌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많이 섭섭하고 서운했을텐데 말입니다. 배신감은 사람이 당하는 상처 중에 정말 큰 상처입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렸던 데마! 알고보니 데마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동역했고 친구처럼 지냈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배신하고 떠났습니다. 저같으면 따져 물었을겁니다. 왜 배신했냐고? 잘잘못을 따지면서 잘못한 사람의 허물을 다 들추어내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배신감에 대한 아픔을 누르고 그들의 허물을 일일이 따지지 않고 그들의 허물을 끌어안았습니다. 왜 바울은 그들의 허물을 들추지 않았을까요? 바울에게는 허물을 들추어내고 잘잘못을 따지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물 들추는데 쓰는 시간을 쓰는게 아니라 시간을 아껴서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수하는데 쓰는 시간, 허물 들추어 내고 잘잘못을 따지는 데 쓰는 시간을 아껴서 해야할 더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바울은 로마의 법정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적대자로 가득 찬 재판장을 복음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전도의 장으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의 태도를 통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수 있습니다.

 

대적자 알렉산더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알렉산더에 대해 자신이 복수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냐하면 15절에 우리 말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 말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전하는 말 즉 복음이다. 복음을 심히 대적했던 알렉산더는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할 때, 복수한다고 알렉산더의 행위와 말에 철처히 갚아준다고 시간을 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 디모데에게는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언지를 준 것입니다.

 

17절에도 동료들이 다 떠나가고 자신을 변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려 떠났던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허물을 말하고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이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가진 자 바울 그가 바로 사명자입니다.

 

몇 주 전에 깨끗한 그릇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깨끗한 그릇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고 모든 선한 일에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릇이 깨끗한 그릇입니다. 여러분이 깨끗한 그릇인 줄 믿습니다. 아멘 하신 분들은 오늘 말씀대로 하면 사명을 담은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릇입니다. 무엇을 담은 그릇일까요? 사명을 담은 그릇입니다. 사명을 담은 그릇이 깨끗한 그릇이요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히 쓰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명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어떻게 지켜주시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17절에 주께서 바울의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바울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울입니까? 바울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된 바울의 곁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바울의 옆에서 변호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 주십니다. 이 말은 죽을 고비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면했다고도 합니다. 바울이 AD58년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로 호송되고 거기서 2년간 연금되었다가 로마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어려운 재판을 거쳐 AD63년 경에 석방됩니다. 그리고 순교하기 까지 다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지키십니다. 사명자에게 담겨져 있는 사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 설교는 제가 저에게 하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바울을 배신하고 떠났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처음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아니요. 처음엔 세상에 있었죠. 하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감격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신 사명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바울을 따라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구령의 열정으로 사역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모르게 점점 불덩어리였던 그들이 식고 식어 숯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돌아봤다고 했죠? 저도 요즘 숫덩이가 되어버린 것같아서 회개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불이 있습니다. 이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할텐데 쌔까맣게 숫덩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사명의 불이 타오르고 기도의 불이 타오르고 구령의 열정이 활활 다시 타오르도록 불덩이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덩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뜨거운 사명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명자란 그릇에 담긴 사명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를 마무리 합니다. 디모데후서를 강해하면서 한가지 그림언어를 여러분의 마음에 심었습니다. 바로 복음의 바통을 들고 달리는 릴레이 선수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는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집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달리고 있습니다. 사명의 불을 들고 마치 달려갑시다. 누군가는 이 사명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 일을 우리 거제호산나교회와 성도들이 해내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