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힘들수록 하나님 품을 파고듭시다: 21장1절~22장2절 본문

구약/사무엘상

힘들수록 하나님 품을 파고듭시다: 21장1절~22장2절

행복으로초대 2016. 11. 25. 18:03

 

힘들수록 하나님 품을 파고듭시다.”

(사무엘상 211~222)

 

사면초가” “궁지에 몰리다

 

사울왕이 다윗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다윗을 암살하려고 하는 시도를 몇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은 완전히 고립되어 갑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다윗이 어디에 있다! 라고 하면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를 몰고 옵니다. 사울의 맹렬한 추격에 사울의 딸인 미갈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다윗의 가정은 파괴되었습니다. 다윗은 궁전에서 도망쳐 사무엘에게로 갔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사울왕이 어김없이 다윗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인생의 벗이었던 요나단에게 갑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궁전에서 쫓겨나고 가정도 깨지고 사무엘에게서도 친구에게서도 안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망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도망치는 다윗의 모습을 보니 정말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완전 궁지에 몰린 생쥐의 처지입니다. 괴로움의 나날들이 계속되니 다윗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21장에는 조금 이상하게 변한 다윗의 모습을 두 번에 걸쳐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용장인 다윗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졌습니다. 다윗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다윗의 이상한 변화 1>

다윗이 놉이라는 제사장의 도시에 피했을 때의 일입니다. 놉을 찾은 다윗을 보자 제사장 아히멜렉은 몹시 걱정하고 무서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 하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찾고 있는 사람을 숨겨 주면 은닉죄가 될 것이고 다윗과 똑같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에게 왜 혼자왔느냐?고 묻습니다 사무엘상 2l2절에 다윗이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이 계속됩니다.

첫 번째 거짓말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을 아무 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거짓말을 합니다. 왜 혼자 왔느냐는 물음에 그는 '사울 왕께서 비밀한 일을 내게 주셨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받들어 혼자 왔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거짓말

그리고 다윗이 먹을 떡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5절에 보면 다윗이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다윗이 아히멜렉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 자리에 그의 말하는 내용을 엿듣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엑이라는 사울의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도엑이 밀고를 해서 결국 아히멜렉 일가와 그의 온 가문이 사울 왕에 의해서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다윗을 숨겨준 것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거짓말 

218절에 보면 이런 내용의 말이 나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은 아히멜렉 제사장에게로 피하려 왔으면서도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무엇을 찾았습니까?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무기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골리앗의 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죽였던 골리앗의 칼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의 말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9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하더라. 제가 왜 이 부분을 생각해 보자고 한 줄 아시겠습니까? 다윗의 이상한 변화? 문제는 거짓말도 문제지만 다윗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한 다윗의 명언을 또렷히 기억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그런데 쫓기다 쫓기다 궁지에 몰린 다윗의 입에서 나온 말. 골리앗의 칼이 있다고 하니 하는 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겼던 골리앗의 칼!!!!! 그 칼을 평가하는 다윗의 말.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라고 합니다. 골리앗의 칼이 최고라고 합니다. 골리앗의 칼만큼 든든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다윗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다윗의 용기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가 말한대로 골리앗의 칼은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최강의 무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분명,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자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의지합니다. 어느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골리앗의 칼을 얻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으면 좋겠죠? 다윗의 마음속의 불안과 공포가 사라졌을까요?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나서 다음 나오는 구절이 더 기가 막힙니다. 10절입니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가지니 모든 두려움이 떠나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날에, 즉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얻은 그 날, 그는 사울을 두려워하고 도망가는데 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도망한 그 땅에서 그의 도망자 인생에서 가장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이상한 변화2>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에로 도망칩니다. 왜 다윗이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을까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는 설득력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가드왕 아기스여! 당신의 적은 사울입니다. 저의 적도 사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이런 논리죠. 하지만 아기스와 신하들은 다윗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예루살렘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블레셋의 자랑거리였던 골리앗을 쳐죽인 다윗으로 미움의 대상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죽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갑니다. 오히려 그 곳에 있다가는 목이 달아날 위급한 상황입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토끼마냥....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용장 다윗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한번 믿음으로 외치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다윗이 성문을 긁어대고 수염 위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넋이 나간 척을 합니다. 온 몸을 벌벌 떨면서 미친 짓을 합니다.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가드왕 아기스가 속아 넘어갑니다. 거의 연기의 신입니다. 대종상을 넘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감입니다. 가드왕 아기스는 지금 네 나라에 미치광이들이 넘쳐나는데...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저런 미친 놈을 데리고왔냐? 당장 쫓아 보내라!!!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다윗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떻게까지 비참해질 수가 있습니까? 한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침을 질질 홀리면서 미친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세요.

고난이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무너뜨리는 데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이 너무 힘들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흐려지게 됩니다. 당장 닥쳐온 고난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집중되었던 마음이 산란해져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고난이 무서운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윗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사울의 추격에 다윗조차도 믿음이 무너지고 맙니다. 고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할 때 길이 보이고 결론이 보이는데,,, 우리의 믿음의 용장 다윗도 계속되는 고난에 그 믿음이 무너져 가는 것을 봅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까요.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럼 다윗이 이렇게 무너져 갈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2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단순한 접속사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란 결론을 맺을 때 하는 말입니다.

21장의 다윗의 이상한 변화. 고난을 만나 살기위해 몸부림치면서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하나님 최고가 아닌 골리앗 최고. 골리앗의 칼로 무장을 해보기도 하고, 살기위해 미친 연기를 하기도 하고 이런 고난의 시기, 힘든 역경을 겪은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 광야의 한 동굴로 숨어들어갑니다. 그렇게 다윗의 10년 광야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로 보입니다. 도망자 모세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광야에 아둘람 굴을 비로소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막장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다윗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피난처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1절의 그러므로는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힘들수록 하나님 품을 파고듭시다.”

 

힘들 때 찾아야할 피난처가 하나님의 품입니다. 힘들 때, 하나님 품을 파고들어갑시다.

 

여기서 성경을 한번 찾아 볼까요? 시편 57편입니다. 시편에는 표제가 있습니다. 표제 즉 시편의 제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언제 쓴 것입니까?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다윗은 아둘람 굴로 피했을 때, 다윗은 고난으로 인해 흐려진 믿음의 눈이 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산란한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신실한 목동으로 돌아가 문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안이 어디에 있는지, 참된 안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의 피난처가 어디인지 재확인 할 수 있는 곳이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을 때. 사면초가의 상황일 때, 하나님은 피할 곳을 내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둘람굴 속에 들어가 혼자 누워 찬양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수록 하나님 품을 파고 드십시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돈이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서 몸을 의탁하십시오. 하나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내가 어디에서 살든, 내 주변의 환경이 어떻든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빼앗기지 아니하는 평안을 찾으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니닙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게 합니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그리고 2. 환란당한 모든 자, 빚지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 빚더미를 짊어진 채무자들, 마음의 원통함으로 힘들어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인생의 낙오자들 모두 아둘람 굴에 옵니다. 다윗과 같은 인생의 고난을 겪고 아둘람 굴에 와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경험하는 은혜가 그들 가운데 임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윗이 회복되는 경험을 그들도 함께 누리는 곳이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둘람은 어디입니까? 힘들 때에 찾는 진정한 아둘람 말입니다. 힘들 때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이 아둘람입니다. 궁전이 아니라도 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곳이라도, 내 마음에 만족함이 없더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으로 변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을 아둘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제가 참 좋아하는 분 중에 맥스 루케이도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 책 중에 믿음 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하나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휫 크리스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난 이 남자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젊었을 때에는 교회직원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도박에 손을 대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월급을 받기가 무섭게 도박판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딸때보다 잃을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도박에 정신이 팔려 야금야금 빌려 쓴 돈이 도저히 갚을 수 없을만큼 커졌습니다. 결국 크리스웰은 자신이 일하는 은행에서 돈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얼마뒤 은행 관리자가 잔고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채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조사 받으러 가기 전날 밤, 크리스웰은 좀체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아내에게 유서를 남기고 차를 몰아 교외로 나갔습니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총을 꺼내 관자놀에 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의 반복을 하면서 총을 올렸다 내렸다. 그때마다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당기라고, 당겨! 이 멍청아. 너는 죽어 마땅한 놈이야!”

그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옥에 갈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도저히 자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씨름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유서를 발견한 가족들은 벌써 경찰에 신고를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아내는 집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와락 껴안았습니다. 경찰관이 수갑을 채워 연행했습니다. 식구들과 이웃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거짓을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홀가분했습니다. 그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휫 크리스웰의 아둘람 굴은 감방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정신을 수습하고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출소한 뒤에는 지역교회 일을 돕고 시간이 지나 교회의 정식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헌신했습니다. 1998년 인근 다른 교회에서 크리스웰을 담임목회자로 청빙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켄터키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한 명의 다윗이 살아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