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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중보자 예수님처럼 : 25장 1절~ 44절 본문

구약/사무엘상

중보자 예수님처럼 : 25장 1절~ 44절

행복으로초대 2016. 12. 7. 16:25

 

중보자 예수님처럼 : 사무엘상 251~44

우리 나라 옛 이야기 중에 바보 온달 이야기를 아시죠? 고구려의 한 마을에 온달이라는 바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에는 평강이라는 울보공주가 있었습니다. 평강 공주가 하도 우니까 왕이 너 계속 울면 바보 온달한테 시집 보낸다....바보 온달은 유명인사였습니다. 울면 바보 온달 울면 바보 온달.... 그런데 평강 공주가 시집갈 나이가 되서 폭탄 선언을 합니다. "아빠, 저 온달이란 결혼할래요." 하면서 왕궁을 나가 버렸습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에게 글을 가르치고 말타고 칼쓰는 무예를 가르쳤습니다. 한마디로 내조의 여왕 평강을 통해 바보 온달이 아닌 온달 장군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를 요즘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성경에 또 다른 바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에 노골적으로 그 이름을 '바보'라고 쓰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바보와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습니다. "바보 나발과 아비가일, 그리고 다윗"이렇게 되겠네요.

 

 

등장인물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 등장인물은 '나발'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에 대해서 표현하는 첫 마디는 '심히 부하여'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소개할 때,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먼저 얘기합니다. 나발은 큰 부자였다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양이 삼천, 염소가 천마리를 가진 큰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갈렙 족속이었더라. 갈렙족속이라는 말에서 무엇인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갈렙은 우리가 알기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렙이라는 이름은 큰 명예이고 갈렙족속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음은 인정해 주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명문가 갈렙 족속에서 전혀 믿음없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나발이라는 변종이 태어났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나발이란 이름의 뜻이 "어리석은 자. 바보"라는 뜻입니다. 설마 부모가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리가 없겠죠. 그래서 나발이 이름이 아니라 보통 별명일 것이다라고 합니다. 별명 또한 그 사람의 중요한 특징을 알려주니까 나발이란 별명을 통해 큰 부자긴 하지만 참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발의 집에서 양털을 깍는 큰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가나안에서는 보통 봄과 가을 한 차례씩 양털을 깍았다고 합니다. 양털을 깍을 때는 빵을 굽고 양을 잡고, 포도주를 넘치게 내옵니다. 노동을 멈추고 수고하여 얻은 열매를 맛보는 좋은 날입니다. 나발에겐 그 손에 가진 것이 가장 많을때입니다.

 

이 좋은 날 다윗은 10명의 소년들을 보내 "좀 도와달라". 지원요청을 합니다.

8절에 보시면 은혜를 베풀어달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으니 네 손에 있는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나발에게 전하는 말에 자신을 나발의 아들, 그리고 보낸 10명의 소년들을 나발의 종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낮추기까지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나발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이유는

7절 다윗이 나발에게 전하는 말.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15절 나발의 종들이 아비가일에게 보고하는 내용에서,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16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다윗은 나발의 양떼와 나발의 목자들을 맹수와 도적떼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들판에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런 다윗의 부대와 같은 세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다윗은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발의 집에서 양털을  깍는 축제의 날에 먹을 것을 좀 달라는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정당한 요청에 바보 나발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은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나발이 다윗을 몰랐을까요? 다윗은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라고만 하면 일단 사람들이 좀 모자른다고 하고 바보같다고 하는 나발이니까 다윗을 몰랐을 수도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람이지만, 나발은 몰랐을 수도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발의 남은 말을 보면 나발은 다윗을 분명히 알고 있고, 사울의 입장에서 선 다윗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는 사울왕을 피해 도망다니는 다윗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발은 다윗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묵살하며 다윗의 망령생활에 대해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마치 반역세력으로 몰고 가서 반역자에게는 떡한 덩이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해석을 이렇게 했지만 나발은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윗의 요청을 거절했는지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만 하면,  나발의 손에는 지금 먹을 것이 가득합니다. 환란당하는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를 보면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고 먹이고 입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자신의 목자와 양떼를 보호해 준 다윗의 선한 일에 대해 선을 악으로 갚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분노하고 흥분해서 자신의 군대 중 400명을 무장시키고 나발의 집으로 쳐들어갑니다.

이 때 한 여인이 극적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3절로 돌아가 볼까요? 바보 나발에게 아내가 있습니다.

이름은 아비가일.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다윗의 요청에 대한 나발의 반응을 본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이 사실을 급하게 아비가일에게 전합니다.

"나발 주인님이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나발 주인님은 오히려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인 주인님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할려고 결정했습니다. 나발 주인님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총명한 아비가일은 급히 떡 이백덩이, 포도주 두 가죽부대, 양 다섯마리를 잡고,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 뭉치 이백개를 다윗에게로 먼저 보내고 남편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 뒤를 따릅니다. 

 

이때 다윗은 맹렬한 속도로 나발의 집으로 향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화나고 흥분했는지 21절과 2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하게 대해 줬더니 다 필요없다. 선을 악으로 갚는 나쁜 거시기네. 내가 그 집안 남자는 씨를 말려버리겠다. 안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리실거다. 씩씩.....씩씩... 어... 열받네.... 이겁니다.

 

그렇게 분노충만해서 달려오는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 얼굴을 땅에 대일정도로 바짝 엎드립니다.

그리고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시작합니다. 24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앞으로 큰 일 하실 분이 어리석은 자 하나로 인해 피를 흘려 이력에 오점을 을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피흘림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 내 주 다윗은 화를 풀고 용서해 주소서."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 "내 주""내 주""내 주"라고 하고 앞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비가일 앞에서 다윗의 분노는 눈 녹듯이 녹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복수의 걸음을 멈추고 돌아갑니다. 나발은 이 긴박한 상황을 모르고 36절에 보면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베푸고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비가일이 자초지종을 말해주자 돌같이 굳어버리고 열흘 후에 죽고 맙니다. 심장마비 같기도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죽었다고 합니다. 나발이 죽자 다윗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던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43절, 44절에는 다윗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이하고 사울이 다윗의 아내 미갈을 발디에게 아내로 주면서 사울과 다윗이 완전 결별되는 상황을 말해줍니다.  

 

이제 오늘 말씀 속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아비가일을 통해 오늘의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이 다윗의 분노의 물줄기를 돌려놓았습니다.
 

자칫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현장이 될뻔 했지만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나발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심판의 맹렬함에서 생명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아비가일을 자세히 보시다 보면 누군가가 떠오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아십니까? "중보자 예수님처럼" 입니다.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비가일을 유심히 보면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과 나발의 중간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십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죄를 대신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혔습니다. 예수님도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녀들을 감싸 주십니다.

디모데전서 2:5~6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이사야 53:6절 -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비가일을 통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중보자의 역할을 잘 해서, 나발 가문의 전멸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중보자가 무엇입니까? 가운데서서 양쪽을 조정해 주는 존재입니다. 교회에는 무엇보다 지혜로운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잠언 25장 15절에는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꺽느니라"고 합니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다 보니, 이런 말 저런 말 참 말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서로 마음의 상처도 받고 관계가 어긋나기도 합니다. 오해가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을 자세히 보면 상처를 더 키우는 분들이 있을  때가 있어요.

 

스가랴 3장 1절~5절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 앞에 서있고 사탄은 여호수아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여호수아를 비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다시 입혀주십니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아둘람 굴 같은 곳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상처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뾰족뾰족 하겠습니까? 잘못하면 서로 찌르고 아프고 상처나고.... 그런 사람들이 죄악을 다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몸부림치시면 죄악의 고통을 고스란히 다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닮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깍이고 또 깍이고 또 깍여서 두리뭉실해 지는 곳입니다. 마치 바닷가에 조약돌 처럼 처음엔 뾰쪽한 돌이었지만 서로 안겨 파도에 이리저리 구르다보면 어느샌가 둥글둥글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때,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은 아비가일처럼., 예수님처럼 중보자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황성표 담임목사님 하면 딱 떠오르는 말이 뭡니까? "최선의 다툼보다 차선의 평화"입니다. 늘빛 성도님들이라면 건들면 나와아죠.

아비가일 같은, 아니요, 중보자 예수님같은 성도님들이 우리 늘빛교회에 가득하면 상처가 싸매여지고 회복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중보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중보기도일 것입니다.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싫어하는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단어의 문제는 뛰어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중보기도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교회안에서 사역이 되도록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야고보서 5장 13~14절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더 나아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목회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중남미에 한 도시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식물들이 죽어가고 물들이 마르고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페허의 도시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유령소리가 난다고 사람들은 그 지역을 여행하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고 공포와 어둠과 두려움이 깔린 지역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중보기도팀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지역에 들어가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앞에 그 땅을 대신해 회개하며 그 도시에 다시 한 번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땅에 너무나 오랜만에 비가 오기 시작했고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땅이 마침내 회복되는 신호탄이었고 이전보다 더 활기찬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인해 다윗의 분노가 가라앉고 다윗은 나발 한 사람으로 인해 나발 온 가족을 학살할 뻔한 위기를벗어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다윗에게는 정말 중요한 사건입니다.

중보자 예수님 같은 역할을 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이 위대한 왕 다윗을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살펴본 25장의 의미는 25장을 감싸고 있는 24장과 26장을 함께 살펴보면 의미가 더욱 풍성해 집니다.

먼저, 오늘 말씀 25장이 사무엘상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한번 볼까요? 24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혹시 표제 제목이 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십시오.

24장은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다입니다. 그럼 이제 26장으로 가봅시다. 26장의 표제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또 사울을 살려주다.

24장과 26장은 다윗의 사울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사울을 살려보내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과 힘을 절제함으로써, 무력을 사용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는 유혹을 두번이나 잘 이겨냅니다. 24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믿음으로 다윗은 시험을 통과하고 영적으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큰 승리 후에 다윗은 다시 한번 믿음의 중요한 시험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25장에서 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26장의 승리는 없을 수도, 아니 있더라도 의미가 없는 승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24장의 다윗과 25장에 비친 다윗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다. 그의 감정은 나발이란 자에게 너무 쉽게 폭발했고, 이성을 잃고 나발의 집안을 몰살하겠다면서 앞으로 있을 그의 왕권에 영원한 오점을 남길 수 있는 위험에 빠질 뻔 했습니다.

이처럼 명예롭지 못한 일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다윗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불명예에서 구해 준 사람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고비를 한 지혜로운 여인을 만남으로 잘 통과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내 감정대로, 내 분노대로 살 수 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인생이 변하고 내 감정대로 내 분노대로가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큰 일에는 담대하게 시험인 줄 알고 큰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큰 믿음의 시험 외에도 순간 순간이 믿음의 시험이고 과정입니다. 큰 믿음의 승리 이후에 찾아온 나발의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비가일을 만남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믿음의 시험들이 여러분에게 닥칠 때마다 예수님을 만남, 예수님을 묵상함으로 인해 참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