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망하는 길을 알면 사는 길이 보인다(유다서 1장 10~11절) 본문
오늘은 약간 유식한 척, 사자성어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前覆後戒(전복후계)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뜻은 먼저 간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 조심하여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앞 사람의 실패(失敗)를 거울 삼아
뒷 사람은 조심하여 실패(失敗)가 없도록 하라는 말이죠.'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망하는 길을 알면 사는 길이 보인다'입니다.
3가지 망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망하는 길을 걸어갔던 3명의 망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망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보고 망하라는 말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3명의 망한 사람을 보고 망하는 길을 걷지 말고
사는 길을 깨닫고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럼 망하는 길을 걷었던 3명의 주인공을 만나보고
그 속에서 사는 길을 찾아 보기 원합니다.
10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중간부터 보시면
'그들은 이성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여기서 '그들'의 정체는 이미 밝혔습니다. 바로 영지주의 이단자들입니다.
여러분! '영지주의'에서 '영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지버섯 뭐 이런거 머리 속에 떠오르고 이러면 안됩니다.
'영지'란 '영적 세계에 관한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란 '아는 자'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영적통찰력을 가진 자,
영계에 관한 모든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라고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10절에서 말하듯이 그들은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 이단들을 '이성없는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들은 신비한 체험을 통해 신비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성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분별력 없는 경험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성이 없는 짐승이니 당연히 본능을 따르게 되고
그들이 안다고 하는 그것으로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고 합니다.
많이 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로 인해 결국 망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망하는 길, 그리고 망한 3명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 길로 가서는 안됩니다. 사는 길을 찾아 봅시다.
첫째. 가인의 길에서 예배로 살아나십시오.
11절을 보시면 망하는 자의 첫번째 길 '가인의 길'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제물의 차이가 아님을 이제는 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 자체를 보시고 받으십니다.
그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는 완벽한 의인이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제사는 죄인들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으로 살려고 하는
죄인들이 살 길을 찾는 것이 제사입니다.
우리가 자칫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벨은 죄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역시 아벨도 죄인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을 찾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었던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살 길임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믿음의 제사를 드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반면, 가인은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증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후,
가인의 마음에 시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안색이 변하고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런 가인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분노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건 사고, 일과 문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 내 마음에 악한 감정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감정에 나를 방치하면 사건, 문제 , 일의 본질은 사라지고
감정싸움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중요합니다.
그 순간은 죄라고 하는 것이 내게 찾아와서
친구하자~손 내밀 때입니다.
그 때 그 손을 과감히 뿌리치고
하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손을 잡아야 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다가옵니다.
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마음에 아벨에 대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감정으로 가득찼을 때,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마음에 아벨이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싹튼 악한 감정에 죄가 찾아와서 친구하자 할 때
손을 뿌리치지 않고 죄의 손을 잡음으로
내 마음에 아벨같이 미워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 아벨과 화해하지 못하면 이것이
항상 영적 생활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이 걸림돌 되는 아벨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마음에 있는 아벨과 손을 잡지 못하고
결국 마귀의 손을 잡고 죄를 짓고 살인을 하고 맙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가인의 안색이 변하고 분노와 시기가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이 때가 바로 은혜의 때입니다.
죄가 가인의 마음에 들어와 범죄하게 만들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죄를 다스려라고 하실 때가 은혜의 때입니다.
가인은 그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분노의 마음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진정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 은혜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지르고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봤을 때 가인의 길이 왜 멸망의 길이 되었는지
원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가인의 길은 '껍데기 종교생활'입니다.
특히 가인은 예배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진심이 없는 예배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같으나
몸만 있을 뿐 마음은 예배의 자리에 없는 사람입니다.
삶이 없는 빈껍떼기 예배였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는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순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혜라고 해서 무조건 위로와 사랑,
소망의 말씀 만을 은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은 참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친구하자 합니다.
그 손을 잡아보니, 어떤 말씀이 들리느냐 하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말씀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에게
교훈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교육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의 시간을 보내는데
그 시간이 바로 예배의 시간입니다.
책망도, 경고의 말씀도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책망과 경고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멸망하지 않고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그가 걷는 죄의 길에서 예배로 돌어서야 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로, 교훈하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로, 바르게 하시고 교육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껍떼기 예배생활을 벗어버리십시오.
들리지 않는데, 감동되지 않는데, 깨닫지 못하는데
들리는 것처럼, 감동된 것처럼, 깨닫는 것처럼
껍데기 예배를 드리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 들리지 않는 것에, 감동되지 않는 것에
깨달음이 없는 것에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돌아서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이 실패하며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이 성공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멸망하는 가인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실패함으로 망했던 껍떼기 종교생활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난다면 회개하고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예배로 살아납시다. 아멘.
둘째. 발람의 길에서 탐욕을 버리십시오.
지난 시간에 먼저 간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 조심하여 경계하라~
라는 말을 하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앞 사람의 실패(失敗)를 거울 삼아
뒷 사람은 조심하여 실패(失敗)가 없도록 하라는 말이죠.'
그리고 망하는 길을 걸어갔던 3명을 소개해 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망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보고 망하라는 말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3명의 망한 사람을 보고 망하는 길을 걷지 말고
사는 길을 깨닫고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그 중 지난 시간에는 가인의 길에서 예배로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발람의 길에서 탐욕을 버려라~입니다.
발람의 길이니까 발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죠?
그래서 먼저 배경 설명 부터 하겠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 이방민족들의 영토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땅을 지나가기만 원했을 뿐 전쟁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전력을 집중해서 싸워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굳이 전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 민족들의 생각은 달랐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러 나왔고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이방민족들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가나안을 앞둔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이것을 보고 위기를 느낀 모압 왕 발락은
아주 유명하고 용하다는 주술가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에게 저주를 퍼 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압왕 발락은 발람을 초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냅니다.
1차 사절단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이 두둑한 복채를 들고 발람을 찾아가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합니다.
이 요청을 들은 발람은 사절단을 하룻밤 머물게 하고
자신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대로 대답해 주겠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1차 사절단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를 많은 신들 중 하나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는
강력한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민수기와 여호수아서에서 발람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점술, 즉 점을 치고 사술을 쓰는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모압왕 발락을 만났을 때도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 제사를 드립니다.
발람이 1차 사절단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같은 강력한 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어떤 무서운 일을 당할지 몰라 발락의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1차 사절단의 요청을 거절하자 다시 2차 사절단을 보냅니다.
1차 보다 더 높은 고관 대작들을 보내고
발람을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해 줄 것이며 말하는대로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한마디로 백지수표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발람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 속으로는 좋아서.
발람이 그 백지수표를 제안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민수기 22장 18-19절입니다.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말하는 사람의 심리를 알수 있는 심리언어, 심리행동들이 있습니다.
발람이 한 말 중에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이 말은 모압왕 발락의 궁전에 있는 모든 은금을 싹 끌어모아 내게 줘도
나는 못가겠다는 말입니다. 사절단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자기가 간절히 마음으로 원하고 사모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못간다는 말을 하면서 강한 부정을 하는데, 평상시 자기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한 긍정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의 탐욕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데,
사절단을 집에 들여 하룻밤 더 유숙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1차에서 분명해 졌습니다. 그래서 탐욕의 마음이 없다면
사절단을 바로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물어보겠다고 합니다.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안 간다고 말은 하면서 행동은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나도 가고 싶다
그러면서 또 말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더하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 자기가 듣고 싶은 가라~는 자기 탐욕을 채우는 말씀이겠지요?
그렇게 밤새도록 철야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갈까요 말까요?
갈까요~말까요? 갈까요 갈까요? 하나님~~~ 대답 좀 해주세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탐욕이 가득한 상태로, 눈 앞에 백지수표가 왔다갔다 하면서
기도한다고 밤을 새고 있는 발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떠셨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허락하십니다.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단 함부로 자기마음대로 예언하여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대로만 말하는 조건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발람은 탐욕에 은사와 사역을 팔았습니다.
그는 물질을 얻기 위해 영적인 것을 파는 삯꾼이었습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축복도 하고 저주도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발람도 멸망을 향해 가는 길에서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발람의 길을 탐욕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죽음과 멸망의 길입니다.
가인도 멸망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은혜의 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발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1.발람에게 찾아온 은혜의 때가 언제인가하면
하나님께서 발람의 길을 막으실 때입니다.
성경에 나귀가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발락의 요청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가 막아섰습니다.
나귀가 길을 막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자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담벽으로 붙어 발람의 발을 짖누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하고
앞으로 가지 못하는 나귀를 채찍질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발람이 비로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가라고 합니다.
단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요? 가지 말라고 했다가, 가라고 했다가
다시 가지 못하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길을 막았다가...
하나님이 왜 길을 막았을까요?
발람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가는 길에 탐욕으로 헛된 상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사는 상상을 했겠죠?
발락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하면 되는 순종의 길이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발람의 길이 내 앞에서 사악한 길이라서 길을 막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실 때가 오히려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무조건 좋은 것일까요?
내 기도하는대로 다 응답받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발람과 같은 탐욕의 사람이 기도할 때, 악한자, 중심이 잘못된 사람을
자기 욕심에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는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둠.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둔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십니다.
악한 자가 악한 기도를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은 들어주심으로
허락하심이 심판이 되게 하십니다. 발람이 이런 케이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탐욕과 반대의
응답이니 하나님의 뜻을 꺾어서라도 탐욕을 채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 욕심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발람의 최후는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을 정복할 때 발람도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분명히 성경에 기록해서
탐욕의 결과가 멸망과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탐욕은 눈을 멀게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바로 앞에 하신 말씀은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인데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은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탐욕으로 눈이 나빠져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도 못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멸망의 길을 가던 발람에게 찾아온 은혜의 때가 또 있습니다.
탐욕을 버리고 돌아설 수 있는 은혜의 때가 언제였을까요?
그리고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하게 합니다.
발람의 관심은 모압왕 발락이 주는 부귀영화인데,
그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주하려고 입만 열만 저주를 못하고 오히려 축복을 합니다.
여러분~~ 발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기도문인지 아십니까?
말은 발람이 하지만 실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이 콸콸 흘러넘치는지 모릅니다.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던 발락의 전략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발람은 이 순간 깨달아야 했습니다.
발락이 주는 금은보화에 탐욕으로 눈이 멀어 잘못된 길을 나섰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회개하고 탐욕을 버렸어야 합니다.
아~~이 이스라엘 백성은 도저히 저주할 수 없는 복받은 백성들이구나.
그 때 자심의 탐욕의 죄를 깨닫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멸망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은혜의 때가 지나갑니다.
그런데 발람은 탐욕에 눈이 멀어 결국 멸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막아 저주를 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발람은 발락을 도와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만드는 꾀를 냅니다.
그것 '발람의 꾀'라고 합니다.
'발람의 꾀'는 모압여인의 아름다움 이용해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남자들을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도록 유혹하고
결국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알려준 이 꾀는 적중해서
이스라엘은 모압여인과 음행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염병이 온 이스라엘 덮쳤는데
이 때 죽은 사람만 2만 4천명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발람의 길이 분명히 멸망의 길이라고했습니다.
발람의 길이 멸망의 길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탐욕, 즉 돈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발람이 멸망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멸망의 길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함으로
두고 두고 멸망받는 사람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돈'은 우리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 잘못된 것이 아니죠? '돈'이 악이 아닙니다.
무엇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자꾸 돈을 사랑함으로 변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절~16절에 이렇게 발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발람은 불의 삯, 돈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를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발람의 행동을 16절에는 선지자의 미친 행동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탐욕을 따라 가는 발람의 길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돈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원칙을 가지는 것입니다.
발람의 길에서 탐욕을 버리는 방법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발람이 저주하려고 하나 축복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를 통해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발람이 하는 말도 발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람을 통해 흘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내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때,
그것을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는 축복을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답입니다. 심부름한다는 말을 예전에 가덕교회 이성수 목사님을
통해 들으셨던 것 기억납니까?
모든 것이 니꺼야 라고 사단은 백지수표를 내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난 단지 심부름꾼.
하나님 주신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에 불과함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발람의 길은 분명 멸망의 길입니다.
망하는 길을 알면 사는 길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길로 가면 망한다고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발람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간이 그 길을 가서 멸망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 길을 가서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탐욕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길에서 탐욕을 버리고
주신 복과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대지2 부록
황금만능주의 시대입니다.
돈이 절대 권력이 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은 '돈'입니다.
돈없이 살 수 없는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에 돈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조금 전 여러분이 새벽기도회 나오시면서 돈 썼습니까?
안썼습니까? 안 쓰셨다구요? 새벽에 일어나서 불 안켰습니까?
차타고 오신 분들 기름값 쓰셨잖아요?
오늘 새벽 날씨 정말 춥습니다.
지금 난방비가 계속 나가고 있습니다. 생활의 모든 부분이 돈입니다.
셋째. 고라의 길에서 겸손으로 섬기십시오.
고라의 길은 권력을 잡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고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길입니다.
민수기 16장에 고라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라는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모세가 분수에 지나치게 권력을 가지고 있고
너무 교만하다는 식으로 대적했습니다.
고라는 그 결과 모세를 따르는 자들과 고라를 따르는 자들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뉘어 지고 말았습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시킨 고라와
그를 따른 자들을 멸망시키십니다.
땅이 갈라져 그 안에 모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해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가인의 길과 발람의 길에서처럼 이런 질문을 한번 해 봅시다.
멸망으로 향해 달려가던 고라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을까요? 아니요! 있었습니다.
민수기 16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이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고라의 당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온 인류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중에서
또 특별한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며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특별한 선택받음과
섬김의 직분이 얼마나 귀한 줄 몰랐습니다.
어쩌면 처음엔 감격하고 감사하며 열정적으로 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불만,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항상 여러분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받아 각자 자기 위치와 부서에서 열
정적으로 섬겨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감격과 감동이 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로 특별히 선택해 구원해 주심도 감사한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음에
늘 감사하면서 섬깁시다.
고라의 길에서 두번째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직분을 권력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직분은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직분은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역할은 '종'의 역할입니다.
한마디로 직분은 종이 되어 섬기는 일에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지위고하의 개념을 교회에서 그대로 적용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처럼 더 높아지려고 경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의 경쟁을 할 때,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다고 하십니다.
악한 경쟁, 선한 경쟁
교회에서 해야 할 경쟁은 누가 더 잘 섬기는가?
누가 더 낮아지는가?의 경쟁입니다.
악한 경쟁에 발을 두지 마시고 선한 경쟁에 발을 두십시오.
어떻게 하면 낮은 자리에서 겸손함으로 섬길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다 각각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모세만 지도자가 되어 스스로 높이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고라의 마음 소리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나도 충분히 지도력이 있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
다 모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잘 보면 모세도 흠이 많고 실수투성이다.
이 많은 백성을 이끌어가기에는 지도력이 부족하다.
과연 모세가 나만큼 능력이 있는가?
그런데 왜 모세만 힘과 권력을 누리고 있는가?
이건 아니야!!~ 나도 충분히 자격이 있단 말이야~~
왜 나를 몰라주는거지?
이대로 있으면 난 그냥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여러분! 이건 고라의 마음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 소리는 아니였습니까?
직분을 힘과 권력으로 생각하고 누가 더 높아질까의
악한 경쟁을 하면 이런 상처받은 자들이 생기게 됩니다.
직분자 선거를 하고나면 시험들었다고 하고
좌절감과 실의에 빠지는 분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런 상처와 실망을 성령의 은혜로 치유받으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음 가득히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혹시나 조금 전 고라의 마음 소리에서
여러분의 마음 소리가 들렸다면 직분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십시오.
잘못된 마음 소리가 들렸다면 기도의 자리로 가십시오.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며 그 곳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다시 내가 어떤 경쟁에 더 관심이 있는지 점검하십시오.
겸손과 섬김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관심이
여러분의 관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경쟁합시다.
악한 경쟁이 아닌 선한 경쟁을 합시다.
고라의 길은 분명한 멸망의 길입니다.
가인과 발람의 길은 개인적인 멸망에 더 가깝다면
고라의 길은 개인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라의 길에서 벗어나 겸손함으로 섬기십시오. 아멘.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복있는 거제 호산나교회 성도 여러분!
껍데기 종교생활 가인의 길에서 예배의 회복으로 살아나십시오.
탐욕의 길인 발람의 길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함으로 탐욕을 버리십시오.
높아지려는 고라의 길에서 겸손함으로 주님 주신 영광스러운 직분에
더욱 섬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있는 사람의 길로 늘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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