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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거짓을 알면 건강한 교회가 보입니다① (유다서 1장 12절~13절) 본문

신약/유다서 완료

거짓을 알면 건강한 교회가 보입니다① (유다서 1장 12절~13절)

행복으로초대 2018. 1. 24. 12:38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유다가 일반적인 구원론 책을 쓰려다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책의 방향을 바꿔 거짓교사들을 경계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부터해서 거짓 교사들의 6가지 특징을 알려줍니다. 

거짓 교사들을 특징을 알아보면서 당시 거짓교사의 영향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들에게 어떻게 침투해서 

교회를 병들게 하는지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1.애찬의 암초

 

첫번째 거짓교사의 특징을 표현한 말이 '애찬의 암초'입니다.

12절에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라고 합니다.

 

'기탄없이'라는 말은 '두려움 없이' '경외감없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두려움없이, 경외감없이 무엇을 했습니까? 함께 먹는다고 합니다. 

함께 먹는 것은 '애찬'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초대교회의 주의 만찬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당시 주의 만찬은 애찬과 성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애찬은 교인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형편에 따라 음식을 가져와서 

교회에서 공동식사를 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이 진행됩니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애찬식 때 성도들이 자기의 것을 가져다가 가난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이 애찬의 아름다운 모습이 퇴색해져 갑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애찬은 사랑의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인데,

사랑의 식탁이 아니라 탐욕의 식탁, 자신의 식탐만 채우는,

자기의 입과 배만 즐거운 식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지적하면서 고린도전서 11장 21절에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여기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 어떤 사람은 '노예나 가난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부자 성도들과는 달랐습니다.

노예들은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제 시간에 참여하기도 힘들고, 음식을 

가지고 온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가난한 성도들도 생계를 위해 힘써 일하고 그럼에도 애찬에서 나눌 

음식을 가지고 온다는 것은 너무 힘에 벅찬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애찬을 하며 함께 식사교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부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예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남겨두거나

아니면 기다려서 함께 애찬을 하면 됩니다.

11장 3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시간도 많고 돈도 많고 산해진미 음식도 넉넉하게 가지고 와서

자기들끼리 음식을 다 먹고 심지어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뒤늦게 와도 먹을 것이 없었고

하루종일 극심한 노동과 생계를 위한 힘겨운 삶을 살다온 자들은 

배고픔과 서러움의 상태에서 이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애찬과 성찬은 그리스도안에 하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오히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서로를 보며 상처주고 받고 

서운함과 섭섭함, 미움으로 파당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성만찬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그러면서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기억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25절입니다.

 23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절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절  식후에 또한 그와 같아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이 떡을 나누면서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나를 위해 희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남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포도주 잔을 나누면서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하시면서

마시게 했습니다. 

옛언약은 '짐승의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에서 포도주 잔을 마시면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왜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 또한 주님 처럼 이웃을 위해서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에는 주님처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주의 만찬의 시간은 위로와 회복, 섬김과 나눔의 시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애찬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애찬을 통해 주님과 연합된 성도들 끼리의 하나됨을 돈독히 해야 하는데.... 

애찬을 통해 예배와 성찬에 들어가기 전 모든 상처와 오해, 시기와 질투,

악한 마음들을 치유하는 시간이어야 하는데....

 

아무 두려움없이 경외감없이 주의 만찬이

오히려 상처받고 서로를 보며 서운하고 섭섭하고 서럽고 괴로운 

자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애찬의 암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암초는 바다에 얇게 잠겨 있으면서 지나가는 배들과 충돌해

배를 침몰시키는 바위를 말합니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에게 암초는 정말 위험한 존재입니다.

건강하게 성장하며 순항하는 배와 같은 교회가 

암초와 같이 위험한 거짓 교사들을 때문에 침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애찬의 암초에 부딪혀 성도의 교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성도들 사이에 서로 파당이 생기고 다투고 나뉘어지게 되어 

교회가 파선하게 만드는 것이 거짓교사들의 역할.

사단과 마귀의 전략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교제를 통해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텃세를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거제호산나교회에 와서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에는 두 배가 왔다 갔다 한다고요.

혹시 기억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예! '가는가 배, 오는가 배' 두 배였습니다. 

새로운 가족이 와도 새가족이 오는가 배~~~~

그렇게 온 새가족이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도 가는가 배

~~~왜 가지? 이렇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엉뚱한 말 같지만 교회가 재미있어서 그렇습니다. 

이상하죠? 교회가 당연히 재미있어야죠.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 끼리만 재밌다는 겁니다. 

서로 만나면 좋고 안보면 보고싶고? 얼마나 좋은 관계입니까?

그런데 자기들 끼만 그렇다는 게 문제입니다. 

 

새로운 교회에 등록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처음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은

사실 교회에 와서 자리에 앉아있는 그 자체가 '공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용기를 내서 교회에 왔는데

누구 한 사람 환영해 주지 않고

누구 한 사람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겁니다.

 

무언가 웃고 즐기고 함께 식사하면서 친교도 나누고 하는데

아무도 비집고 들어갈 구멍조차 없다면 그 친밀함은 깨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친교를 나누는 그룹을

자기 세력화 해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건 교회 뿐만 아니라 상위 기관인 노회와 총회에 가면 더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는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준비해서 먹고 가난한 자들을 왕따시킨 것입니다.

애찬을 통해 서로 구별하여 당을 짓고 세력을 만드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찬의 암초입니다.

 

주님 안에 하나된 성도 여러분!

'친교'라는 좋은 단어도 자칫 잘못하면 암초가 될 수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거짓을 알면 건강한 교회가 보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꽉 잡은 손을 잠시 놓으십시오. 

전도회, 구역과 친교 소그룹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새가족이 오면 누구나 따뜻한 여러분의 마음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아름다운 미소를 교회 안에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어렵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교회의 친교 안으로 당겨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친교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손을 잡고 주님 안에 한 가족으로 교제가 더욱 풍성해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 

 

지난 시간에 거짓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잘못된 교회의 모습

첫번째, 애찬의 암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애찬, 성도의 식사의 교제를 통해 아름다운 친교와 연합을 이루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친교하고 하나되는 것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암초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일까요?

1)끼리끼리일 때, 즉 교회가 특정그룹끼리 세력화할 때.

2)친교가 좋지만 교회의 다른 어떤 목적보다 친교 과잉일 때, 친교과잉증. 

이렇게 되면 애찬의 암초가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사실 이 표현은 목회자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이용하는 자들,

즉 삯꾼과 같은 목사들을 말합니다.

 

참된 목자가 누구인가?

요한복음 10장 11절 이하의 말씀에서

참된 목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다 준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는 모든 관심이 양떼에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 양들이 어떻게 우느냐에 따라

양들의 건강과 형편을 살피고 양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거짓 목자는 양떼를 자기 양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관심도 없습니다.

양 떼를 치고 받을 삯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혹시나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면 얼마든지 양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양들을 착취하고 부려먹습니다.

자기 배만 부르고 자기 부만 축적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를 만나면 교회와 성도들은 참으로 불행해 집니다. 

이런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 가 어느 시대에서든지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어지럽힐 것임을

에스겔서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4장 2절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에스겔 34장 3절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는 것인데.  

오히려 살진 양을 잡아 먹고 그 털을 입고 양떼는 먹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목자이면서 마땅히 해야할 양 떼를 먹이는 일을 하지 않을까요?

 

결핍의 문제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핍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결핍의 빈공간을 채우려고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목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결핍을 채우는 목자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기 몸을 기르는 목자'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삽니다.

반면 선한 목자는 양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삽니다. 

자기의 결핍이 아닌 양들의 결핍을 채우려는 것은 거룩한 결핍입니다. 

 

사도행전 초대교회 때, 가난하고 굶주린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는데, 대표적으로 바나바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가난한 성도, 굶주린 성도,결핍을 안고 사는 성도들을 위해

자기의 밭을 팔아 가난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을 살리는 일에 썼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대로 위로의 아들 이라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반면 바나바의 헌신과 함께 기록되어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명예에 대한 결핍이 있어 보입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바나바를 보면서 위로의 아들이라 칭찬하는 것을 보니

바나바처럼 자신들의 이름도 교회에서 높여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처럼 해 보려고 했으나 

막상 전부를 헌신하려고 하니 너무 아까웠던 것입니다. 

결국 딸을 판 값에서 얼마를 뒤로 감추고

하나님을 속이고 마치 자신의 전부를 다 헌신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자기 명예와 지위를 채우려고 하고 명예를 위해 재산을 내놓았으나

결국 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지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의 모습니다. 

 

교회도 자기 몸만 기르는 교회가 되지 말고 

참된 목자처럼 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을

단순히 양적, 숫자적인 성장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부흥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에스겔 34장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안타깝게도 자기 몸만 기르는, 자기만 먹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참된 목자의 모습, 

그리고 그 목자가 다스리는 양떼 즉 교회가 어떤 일에 힘써야 할지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연약한 자, 병든 자, 상한 자, 쫓기는 자, 잃어버린 자가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이런 성도들의 형편과 사정을 보며

온 성도들이 마음을 다해 강하게 하고 고치고 싸매주고 돌아오게 하고 

다시 찾으려고 힘쓰고 애쓰는 교회가 참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말씀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19)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사명을 교회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런데 부흥을 이야기하면 일단 성도수의 성장을 말합니다.  

부흥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는 자들이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나지만

단순히 교인수만 더해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인수가 많지 않더라도 교회가 마땅히 해야할 복음의 능력을 

전함으로  성도들의 모든 힘과 에너지가 무엇에 집중되야 할 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에스겔 34장 4절. 

이런 일들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 

 

선한 목자는 자기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참된 목자의 관심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성도들을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살을 찌우고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할까?

이것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는 교회의 몸집 불리기 에 관심을 두고

외형적으로 큰 교회 건물에 마음을 두고

큰 교회의 목사로서 누리는 세상적 영광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교회 이름 중에 '만명교회'가 있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성도수 만명을 목표로 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만명은 커녕 백명 언저리도 못갑니다. 

 

반면 2022년 4월 10일,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회인 분당 우리교회가 

일만성도 파송예배를 드리고 일만명의 성도를 29개의 

교회로 분립개척을 했습니다.

각 교회당 약 300-400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각 지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교회 성도들의 숫자를 교회성장으로 여기고

교회성도수를 부풀려 말하고 모두 더욱 큰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이 때에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데 그렇게 모여든 성도들의 영혼을

건강하게 먹이고 살려서 다시 작은 교회들로 파송해

작은 교회에 가서 봉사하게 하든지,

아니면 교회를 분립개척을 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건강한 사역을 통해 건강한 교회를 계속 세워나가는 일을 합니다.

 

우리교회 건강한 교회세우기를 통해 작년에는 빛으로교회를,

올해는 연구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선교관. 많은 힘이 듭니다. 많은 예산이 듭니다.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관 사역)

 

왜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가 될까요?

시편23편 1절 여호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신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고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풍성함으로 .....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재밌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압제하는 자들을 교회가 반겼다는 구절입니다.

예레미야 5장 31절에 보면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자기들 위에 권력으로 군림하려는데

백성들이 그것을 좋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상하죠? 사도 바울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11:30)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짓 교사에 미혹되면 이렇게 됩니다.

지금 활개를 치고 있는 이단들과

그들에게 미혹되어 넘어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정신과 영혼이 털려도

잘못된 것인줄 알지 못하고 맹신하고 따르는 것을 보십시오.

 

 

3.물없는 구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거짓된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살다가 결국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의 심령은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셔서 우리의 심령을 

촉촉하게 적셔주셔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십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6) 

바울을 보내시고 아볼로를 보내셨고 지금도 이와 같이 단비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목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긴 가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집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습니다.

태양 빛은 지글지글 땅을 뜨겁게 달굽니다.

사람들이 한 숨을 쉬면서 하염없이 하늘을 봅니다.

왜 하늘을 볼까요? 뭘 기다리는 걸까요? 구름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떠올라 메마른 땅을 적셔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때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하늘에 구름이 떠올랐고

구름이 더욱 커지고 하늘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왠 일일까요? 비가 오지 않습니다.

뭐가 잘못된 걸까요? 바로 물없는 구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반가운 빗소리를 들려주기만을 기다렸는데

비를 줄 수 없는 물없는 구름이라니,
이 모습이 거짓 교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리가 없으며

영적인 권세가 있는 것 같지만 영적인 참된 역사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유창한 말과 언변은 있으나

참된 생수로 갈급한 심령을 채울 수 없는 것이 거짓 교사입니다.

 

성경에서 비없는 구름으로 표현한 다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잠언 25장 14절입니다.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25:14)

 

선물한다고 잔뜩 기대에 부풀게 해놓고 

막상 자 선물~~하는데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비없는 구름, 바람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큰 은혜를 내려 줄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지나고 나면 정작 아무런 영적 유익도 남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구름없는 거짓 목사들의 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들의 입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입니다. 

성경을 풀어내는 것도 육신적으로 풀어냅니다. 

그러므로 영혼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예화) 

여러분~~날도 더운데,

오늘 내가 개고기를 먹었어요.~~개고기의 효능.

(놀라운 것은 개고기를 먹었어요~하는데도 성도들이 아멘. 아멘. 아멘.)

처음 한 20분은 건강강좌를 하고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몸을 건강하게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믿는 사람은 두손들고 아멘. 

 

구름없는 거짓 목사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말이 얼마나 유창한지 성도들을 들었다 놨다. 

웃겼다 울렸다 하니 성도들이 은혜받았다고 난리인데,

성경에 대해서는 거의 풀지를 않아요. 

 

물없는 구름이 거짓 선지자의 모습일 때, 

구름에 물이 없다는 것은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라고는 하는데 말씀은 장식이 되고

자기 간증, 세상정보, 교양책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을 그럴듯한 언변에 얹어 설교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는지 아닌지를 분별하셔야 합니다. 

말의 유창함은 떨어질 수 있지만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하는 길은

구름 속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이제 구름 속의 물이 무엇인지 아실 겁니다. 

 

신명기 32장 2절 말씀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신 32:2)

 

그러므로 목사와 성도들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은 참된 진리의 말씀을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묵상이 깊은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영감있는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더욱 전념해서

성도들에게 진짜 생명력 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진짜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도님들은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개고기를 먹었어요~~~~ 해도 아멘 아멘.... 안하는 성도.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없는 구름은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바른 해석과 적용이 담긴 설교를 듣고

분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물없는 구름이 되지 않도록 모두가 다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후임목사님 청빙을 위해 전 교인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아시겠습니까? 다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