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이렇게 기도하여 일어납시다 : 5장 35~43절 본문
이렇게 기도하여 일어납시다.
(마가복음 5장 35절~43절)
날씨가 참 화창하네요. 서로 인사할까요? 이 화창한 날에 축복합니다.
이 화창한 날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러니 해피엔딩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죽음과 같은 고통이 있을지라도 부활이라는 희망의 해피엔딩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12살 난 소녀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죽은 소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이 말은 "달리다"는 연약한 나약한 미천한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소녀야~ 아주 작은, 연약한. 불쌍한 소녀야! "굼"이라는 말은 "일어나라" 입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남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쓰러져서 힘을 잃고 주저 앉아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달리다굼 하시면 힘있게 다시 일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오늘 본문이 35절부터인데, 실제 이야기는 22절부터 시작합니다.
22~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회당장 중에 하나인 야이로라고 하는 이가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35절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22절에서 시작합니다.
22절에 회당장인 야이로가 등장하고 그가 예수님 발 앞에 바짝 엎드려 있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하면 백성에게 존경받는 위치, 인정받고 높임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회당은 단순히 모여서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학교의 기능, 사회적인 통합의 기능, 재판소의 기능, 법적인 권위를 가진 곳입니다. 한마디로 회당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입니다. 그 곳의 '장'으로 있는 사람이 야이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높임받는 사람이지만 야이로는 지금 그런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23절, 간곡히 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 성경에는 많이 구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구하고 또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하고,....
여러분 그림을 한번 그려보세요. 나이가 지긋한 근엄한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무언가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엎드려 간곡히 구하는 이유는 그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자신의 어린 딸이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죽음의 선고를 받고 몇 개월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위급한 것입니다. 여러가지 방법을 써봤겠지만 다 실패하고 이제 예수님께 와서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어떤 어려운 문제가 없었으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분들이 있을 겁니다.
평안할 때, 인생이 탄탄대로 일때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 하나님의 도움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막상,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니까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그렇게 엎드리는 자리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살아나기만 하면 됩니다. 딸만 살 수 있다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 제발 고쳐주세요. 제발 제 딸을 살려주세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무슨 일이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간데...그래? 안됐네. 사람들이 불쌍해 하지만 야이로가 느끼는 절박한 심정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체면을 많이 생각합니다. 예배시간, 기도회 시간에 사람들 시선 때문에 제대로 찬양도 못하고 기도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손 들고 찬양하고 싶고, 춤추며 찬양하고 싶기도 한데 못해요. 왜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니까.
제가 몇 년 전에 어떤 집회에 참석했는데, 저도 너무 절박하게 간절하게 주여~~~하고 기도하고 찬양할 때, 신나게 찬양하고 방방 뛰면서 율동도 따라하고 높이 뛰면서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한 권사님이 저를 톡톡 두드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체통을 지키셔야죠" 저는 찬양을, 기도를 그렇게 안하면 안되겠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은혜 받는데 체통은 무슨 체통입니까? 물에 빠져 꼬르륵 꼬르륵 빠져들어가는데, 저 멀리 사람들이 보입니다.
수영을 전혀 못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체통을 지키면서 고상하게 나긋하게 "살려주세요"할까요? 아니면 목이 터져라 팔을 막 흔들면서. 몸부림치면서 "살려주세요~~~~~~" 할까요? 은혜받은 데 체통이 문제입니까? 은혜 받을 땐 사람들 얼굴 보지 마십시오. 은혜받을 땐 하나님 얼굴을 봐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얼굴만 보시면 됩니다.
회당장이면 뭐합니까? 딸이 죽어가는데... <기도하는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바짝 엎드려 간곡하게 몇번이고 몇번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방해되는 것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들, 자꾸만 숨기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오픈하지 못하는 것들.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마시고 간곡하게 바짝 엎드려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문제해결은 거기서 시작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34편 6절)
여러분! 곤고하십니까? 사람들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을 주님께로 가지고 와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계속 기도하십시오.
첫번째는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두번째는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제가 오늘 본문에 35절부터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22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 중 뜬금없이 한 사건이 추가됩니다. 12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길을 나서십니다. "알았다. 너의 소원을 알았으니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니 문제를 해결해 주께"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러 출발하셨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시며 그 길에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쌌습니다. 급박합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빨리 가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서 가기가 힘듭니다.
TV를 보시면 유명 연예인이 도심 한 복판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 일대가 마비가 됩니다. 그러면 보디가드들이 비키세요. 비키세요. 하면서 길을 만들죠. 밀고 밀고 합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빨리 가야되는데, 답답합니다. 길은 막히고 사람들은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갑자기 예수님이 쭉 가시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한 여인이 "예수님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병을 고쳐보고자 별의별 수단을 다 써봤겠죠. 유명한 의사들을 다 찾아가봤을겁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날리고 이젠 희망이 점점 사라져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마지막 희망이 생긴 겁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지기만 해도 내 12년 혈루증이 나으리라 라고 생각하고 사람들 속에 자신을 숨기고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혈루증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정말 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길은 막힙니다. 빨리 가셔야 되는 예수님은 뜬금없이 나타난 여인과 대화를 하십니다. 여러분! 왜 지금 상황이 일어났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은 "내가 너의 딸을 고쳐주리라"고 하시고 길을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인데, 왜 시간이 지체되고, 마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가는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할까요?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쭉 진행되다가 회당장 야이로는 분문에서 사라집니다. 사라졌다가 35절에 가서야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면 회당장 야이로가 딴 곳에 갔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과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자리에, 바로 옆에 있어요. 바로 옆에 있어요.
그러면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습니다. 처음엔 안절부절하다가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여인이 나은 것, "어떻게 12년된 혈루증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고쳐질 수 있지?" 아~~~~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수 있구나! 그럼 내 딸도 분명히 살 수 있을꺼야. 이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분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예수님이시구나. 이렇게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보게 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어느 한 마을을 심방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지 모르겠습니다.
저번 대심방할 때, 담임목사님과 함께 한 가정을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따님이 결혼을 한 후, 세월이 많이 지났는대도 아기가 없어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담임목사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목사님 기도하실 때,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십니까? 주여~~~ 하시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심방하니까 아기가 생겼다는 거에요. 그것도 말입니다. 우리 목사님, 쌍둥이 아빠라는 거 아시죠? 아기가 생겼는데, 하나 주신게 아니라 둘을 주셨대요. 우리 교회 쌍둥이 많은 거 아세요? 세 쌍둥이도 있어요. 우리 목사님이 쌍둥이 아빠니까, 교인들도 쌍둥이 가정이 많아요.
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시네. 역시 하나님은 기도하니까 들어주시는 능력있는 하나님이시네요."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즘 불임 가정도 많은데, 저도 가서 기도하면 아기가 생기게 해 주실꺼죠"
하나님 아직 응답이 없으세요.ㅎㅎㅎㅎ. 하나님. 목사가 되서 성도들의 가정에 가서 성도들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걸 확신합니다. 아멘. 하고 성도들을 위해 더 기도하게 되요.
그래서 성도 여러분 계속 기도하십시오.
비록 문제 해결이 늦어지고, 더디게 가더라도, 말씀의 확신 가지시고, 성도들의 기도응답의 간증도 들으시고, 그 믿음 가지고 계속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낙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가 재판관에게 매일마다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계속, 자주 자주 찾아가니까 재판관이 괴로워서 원한을 풀어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말이 다를 뿐이지, 계속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찾으라. 한번 구하라. 한번 두드리라가 아니라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생각과 다르게 느려질 수도 있지만 그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계속 믿읍시다.
첫번째는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두번째는 계속 기도하십시오. 세번째는 계속 믿읍시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언제입니까?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누구와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혈루증 여인입니다. 그 때, 회당장의 집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다는 겁니다. 상황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보고입니다. 슬픔의 소식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회당장의 집에서는 사람들이 심히 울며 통곡하고 야이로의 딸의 죽음으로인해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39절엔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에 내가 기도를 했는데, 급하고 간절한 제목으로 기도를 했는데, 끝나버렸다. 내 생각과 다르게 내가 손 쓸수도 없이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심히 통곡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통곡의 자리에 들어가서 어찌 떠들고 통곡하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십니다.
죽은 것이 아니다. 잔다!!!! 전체적으로 이 본문의 시제가 현재시제입니다.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완료되어 버린 것으로 끝났다. 절망,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끝났다가 아니라 잔다라고요.
오늘 여러분 얼굴을 뵈서 참 좋네요. 오늘 만나니 참 좋네요.
혹시 여러분, 어제 잠자리 들면서 "난 오늘 자다가 죽을거야" "아니, 오늘 내가 자다가 죽으면 어쩌지?" 이렇게 하면서 주무신 분 계십니까? 하루 종일 수고하고 땀 흘리고 잠자리에 들 때는 편안하게 안식을 누립니다. 그냥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서 또 생활하는 거죠.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는 동안에 지켜 주셨음을 믿으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안전하게 편안하게 눈뜰 수 있게 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자는 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면서 살짝 언급하고 지나간 것이 있습니다.
24절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이것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서셨다는 것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친히 나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가 제 딸을 고쳐주십시오. 그래 알았다 너의 소원대로 내가 니 딸을 고쳐주께.라고 하시면서 그 길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고 살려줄 것이라는 약속은 끝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수준에서 보고, 내 환경에 따라서 보고, 난 끝났어. 난 더이상 희망이 없어. 난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날수 없어. 힘들어 죽겠어.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을 포기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께 다 내려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계속 기도하는 사람에게는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끝까지 행하실 줄 믿습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계속 진행하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가 나는 죽었다고 생각되어도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계속 진행중입니다.
계속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실 마지막 순간의 행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그 믿음을 가지고 계속 믿으라 하십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41절에 죽었다 하는 소녀에게 "달리다굼" 일어나라 소녀야~~ 라고 외치십니다.
여러분! 이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평범한, 실제 생활 속에서 정말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특히,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님들이 정말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밤새 뭐했는지 아침에 학교에 가야 되는데, 안 일어납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학교 가야지~~ 엄마 5분만. 엄마 1분만 엄마 30초만... 안 일어나니 발로 뻥뻥 차며 일어나라!!! 생활용어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달리다굼~!!!!!!
달리다굼 하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요즘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녹녹치 않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 때 이 약속의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달리다굼'. 죽음에 있는 자도 달리다굼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죽음의 문제조차도 해결하셨던 예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예수님입니다.
달리다굼을 향해, 다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계속 기도하십시오. 계속 믿으며 일어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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