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벧전5:1-4 성도의 전공과목2증인되기-사랑받고 용서받고 회복되기 본문
성도의 전공과목2-증인되기
사랑받고 용서받고 회복되기
1.성도의 전광과목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도의 전공과목 첫 번째 시간
함께 하기 그리고 낮아지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 낮아져야 합니다.
‘함께하기’와 ‘낮아지기’를 전공으로 잘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공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잘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함께 해 볼까요? '증인되기'입니다.
증인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증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보지 않고는, 듣지 않고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경험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트라우마 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렇습니다.
과거 경험했던 위기나 공포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다시 느끼면서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을 말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트라우마를 겪어본 분들이 계실 겁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뭐보고 놀라다고요? '솥뚜껑' 보고 놀랍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큰 트라우마는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이것만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절대로 보여주거나 듣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닭입니다. 그리고 닭울음소리입니다.
그것도 새벽 닭울음소리는 절대금지입니다.
진짜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평생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닭, 닭울음소리.
새벽에 닭울음 소리가 들리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새벽에 닭이 울면 예수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부끄러운 장면이 생각이 났을 겁니다.
한 주간 계속 복음서를 읽고 찾아봤습니다.
베드로가 언제까지 예수님 곁에 있었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어디까지 봤을까?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못박힌 골고다 언덕 십자가 밑에 있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면서 고난이 시작될 때,
멀찍히 군중들 속에 숨어서 정체를 숨긴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거짓증인들의 증언,
사람들의 주먹과 손바닥에 얼굴과 뺨을 맞았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닭이 두 번째 울었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쳐 몰려오는 죄책감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누가복음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을 지켜보았던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베드로는 실제로는 예수님의 고난당하시는 장면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는 모습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조롱과 멸시를 당하심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에 찔리심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으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하면,
그렇죠! 베드로는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은 엄연히 다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누구보다 부끄럽고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베드로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 부끄러워하고 수치심이 가득해야 할 텐데,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담대하게 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누구보다 강력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특별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함께 따라합니다.
사랑받고 용서받고 회복되기.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던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가지 과정을 따라가 보기 원합니다.
사랑받고 용서받고 회복되기.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사랑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증인되기'라고 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증인이 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해야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용서해야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
'회복해주어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해 주셨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회복을 경험하면
자연스럽게 증인이 되어짐을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첫째,증인되기 위해 ‘사랑받기’를 잘 합시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죄책감, 부끄러움과 수치, 고난에 대한 회피.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하면서 고기 잡던 베드로의 마음속 감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 느끼는 상실감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고기 한마리 낚을 수 없는
무력감, 절망감 등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풍족했는데, 예수님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그런 베드로에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이렇게 묻습니다.
"니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예수님과 멀어진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심으로 베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고백을 받으시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야~내가 다 안다. 네가 그 때 모른다고 했지?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럽게 지낸 것 다 않다.
나는 괜찮아~네가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베드로야 사랑한다 내 맘 알지?”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잘못된 인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과 못과 창으로 맞으시고 찢기시고
찔리신 끔찍한 고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께서 그런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목적, 첫번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더욱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증인이라면 전도자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전도자들을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전도자는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이기 전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 사랑을 받을 때 증인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많이 받는 증인이 되기 위해
'묵상하기' 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먼저, 묵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소유입니다.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지 마십시오.
내 손이 풍족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내 손에 들려진 것이 없고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이렇게 내 손의 소유를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 손을 묵상하지 마시고,
'나'를 묵상하십시오.
'나'의 죄인됨을 묵상하십시오.
나의 연약함을 묵상하십시오.
나의 부족함을 묵상하십시오.
번번히 실패하고 또 다시 회개하고 후회하고 회개하고 후회하는 나.
시시 때때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같은 나.
그런 나를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같은 죄인도 살리시는 하나님.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는 하나님.
(나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
나는 죄인이요 나는 배신자요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 중에 괴수지만
그런 나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넓은 품을 이번 한주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나를 더럽다 내치지 않으시고
갈곳 없어 방황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따뜻한 품에 앉으셔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씀해주는 주님을 묵상합시다.
사랑은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진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나의 부족함도, 나의 연약함도, 나의 죄인됨도,
내가 어떤 것에 자주 시험이 들며, 어떤 것에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지만 나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를 향한 너무나 큰 사랑으로 나의 모든 연약함과 죄인됨,
부족함을 다 덮으시고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키시는 위대한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많이 받으면, 그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증인되기를 잘하기 위해 오늘도 예수님의 크신 사랑 속에 살아가기를 기도합시다.
두번째, 증인되기 위해 ‘용서받기’를 잘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고난이 가진 ‘용서받기’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채찍과 못과 창으로
맞으시고 찢기시고 찔리신 끔찍한 고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께서 그런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 너무 예수님의 고난만,고통만 집중되는 점>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은 죄악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특별한 사건, 그 상황 속에서
그 고난은 어떤 사람이든
모든 이들을 죄에서 용서하고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죄악된 세상에서 건져내어 예수님 안에 새 삶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단어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용서받기’를 잘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기를 잘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받기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기도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내가 용서해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받기를 잘 하는 방법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화: 코리텐 붐 여사
코리텐 붐 여사님은 세계 제 2차 대전 때,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다는
이유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아버지와 언니는 죽고,
코리텐 붐 여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한 간수가 코리텐 붐을 끔찍히도 고문을 하고
죽을만큼 학대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코리텐 붐은 미국으로 건너와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무진 애를 썼으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그녀를 못살게 굴었던 그 간수가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코리텐 붐이 유럽을 방문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집회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한사람을 보고는
그만 온몸이 얼어붙고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에게 모진 학대를 가했던 바로 그 간수였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코리텐 붐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코리텐 붐 여사. 나는 당신을 온 유럽을 다 뒤지며 당신을 찾아왔었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큰 죄를 당신에게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코리텐 붐은 얼굴을 마주하기가 괴로워서 땅 밑을 바라보았고
결코 그 사람을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나에게 악랄하게 대했는데, 그렇게 쉽게 용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가 지은 죄의 댓가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를 용서해줄 수 없었습니다.
코리텐 붐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사람은 코리텐 붐의 팔을 잡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용서해 줄수가 없었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녀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되는대로 그녀를 발로차고
때리고 쓰러뜨리고 하던 장면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결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성인 군자는 아니지. 나는 네가 저지른 댓가를 치루는 것을
분명하게 이 두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어 망설이는 그녀에게, "코리야, 그냥 손만 내밀어라."
코리텐붐이 이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속에 용서하는 마음으로 채워주셨고
마침내 그녀는 원수를 용서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닌가요?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감정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되게 해주시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를 받는 길을 확인했습니다.
어쩔 수 없네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여러분 ~ 힘들시죠? 어떤 사람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어떤 상황 때문에 괴로우시죠?
내 감정으로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치는 내 마음을 누가 잡아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잡지 못하되 그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증인되기 위해 마음을 결단하신 여러분~오늘 이시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 마음 가운데 가득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증인되기 위해 ‘회복되기’를 잘 해야 합니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란다" 하면서 고기잡은 어부가 되겠다고 합니다.
갈릴리바다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으면 보람을 생길 줄 알았습니다.
자신감도 생기고 무력감도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무슨 일이든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일을 하면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베드로의 마음을 회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진정한 회복은 사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사명을 회복할 때 일어납니다.
“쿼바디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십계, 벤허 와 함께 세계3대 기독교명화 중 하나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가던 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당황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간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돌아가서 큰 박해 가운데서도 다시 힘있게 복음을 전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를 당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과 똑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 하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를 요청하고 70세가 넘었을 때 순교를 당합니다.
고기낚는 어부 베드로를 부르셔서
사람낚는 어부로 삼아주셨던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다시 고기낚는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사람낚는 어부로 다시 사명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가 증인되기 위해서는 사명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고기낚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로,
사람낚는 어부에서 양무리를 이끄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선한 목자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양떼 같은 성도들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베드로는 목숨을 버려 순교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졌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곳, 보내신 곳으로 돌아가는 것: 회복되기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이 생겨, 다 내려놓고 싶고,
각종 교회봉사? 사역? 선교? 목회?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 끝나고 다 회복될 줄로 압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복은 내가 부르심 받은 그 자리, 나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직분의 자리에서 주를 위해 쓰임받는 것이 회복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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