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나의 관심이 바로 나 입니다 : 느헤미야 1장 1~11절 본문
나의 관심이 바로 ‘나’입니다. 느헤미야 1:1~3
<설교1>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시대가 어렵고 민족과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해법은 항상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받을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실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울 때입니다.
이 때,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든든히 서기를 원하며,
우리 호산나교회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요즘 느헤미야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시간에 제 순서에는 느헤미야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느헤미야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겠습니다.
유다왕국이 BC586년에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멸망을 당합니다.
그때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그 후, 바벨론이 망한 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1,2,3차에 나눠 귀환하게 됩니다.
1차 귀환은 스룹바벨이라는 지도자를 따라
5만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귀환했고,
그들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1차 귀환 후, 약 80년 뒤,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귀환을 했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보니 1차 귀환 때,
성전을 재건해 두었지만 후손들이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과 혼인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타락해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타락의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다시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철저히 회개하게 합니다.
그렇게 백성들이 신앙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 다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났지만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바벨론 침공 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포로 귀환 할때마다 유대인들은 성벽을 재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주위 민족들의 극심한 반대와 방해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성벽을 쌓으려고만 하면 와서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죽이는 통에
공사가 진척될 수가 없었던 거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이야 성벽이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당시 '성벽'이란 사람들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해주는 보호막이었습니다.
성벽은 나라의 자주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마치 집없는 아이처럼 무시당하고 공격해서
노략하기 딱 좋은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적들이 쳐들어와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훔쳐가고,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합니다. 불안하고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에스라의 2차 귀환 후, 약 12년 후의 일입니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그리고 느헤미야가 어디에있다고 합니까? 수산궁에 있다고 합니다.
수산궁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왕궁이었습니다.
당시의 왕은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초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술을 맡은 관원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웨이터라고 하시던데,
당시 술관원은 비서실장에 버금가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항상 암살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에게 올리는 음료와 음식을 사전에 검사하고 맛을 보는 직책입니다.
왕이 가는 곳에는 항상 동행합니다.
공식석상이든 사적인 자리에도 늘 함께 합니다.
왕 옆에 함께 있어야 하니, 외모도 출중해야 되고요.
왕과 늘 대화를 해야 되니, 해박한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왕을 위험에서 지킬 수 있는 출중한 무예실력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술맡은 관원은 그만큼 중요한 직책입니다.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지 않고서는 임명받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명예도 얻었고, 재물도 , 권력과 힘도 가진 사람입니다.
그대로 그 지위에서 평안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관심은 페르시아에서 얼마나 더 권력을 누리느냐?
재물을 모으느냐? 어떻게 하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마음과 관심이 온통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의 형제들 중에 하나니가 유다에서 왔습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친동생입니다.
그는 에스라가 주도한 2차 포로귀환 때, 귀환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느혜미야는 본국으로 귀환하고 싶었지만
왕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신하였으므로
왕이 허락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항상 마음이 예루살렘을 향해 있으니 예루살렘에서 하나니가 도착하자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은 당연히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형편을 물어보는 것~~~ 관심이 없으면 물어보지 않죠!!!
느헤미야는 관심이 예루살렘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불타버린 성벽은 잘 재건되고 있을까?
또 하나님의 백성들은 굶주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까?
외적의 침략으로 고통받지는 않았는지.....“이것이 느헤미야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관심이 더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1절 “하가랴의 아들 느헤이먀의 말이라”
‘하가랴’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호와가 자취를 감추었다.
여호와가 어둡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왜 부모가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하가랴의 아버지, 즉 느헤미야의 할아버지 때
예루살렘 성이 함락 당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해 느헤미야의 할아버지와 온 가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할아버지가
그 아들의 이름을 ‘하가랴’라고 지은 것입니다.
패망한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그 아들의 이름 속에 담아서
아들에게 그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가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의 할아버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망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았고
다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하심에 대한 기대와 기다리는 모습을
아들 하가랴와 손자 느헤미야에게 까지 전수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민족을 다시 재건하실 여호와 하나님만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할아버지의 신앙이 느헤미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의 관심은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간 자신의 민족이었습니다.
나의 관심이 바로 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평안해지면 변질되기 쉽고,
방탕하기 쉽고,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힘을 다해 신앙생활에 주력하던 사람이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해지고, 넉넉해지면서 믿음이
그런 열심이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잊지 않았고, 자기 백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늘 생각했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에 있던 동생이 오자마자,
유다 백성들의 안녕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제일 먼저 물었던 것입니다.
어제 목사님께서 호산나교회 초창기 시절에 비가 오면
교회에 비가 새서 새벽 이고 뭐고 상관없이 교회에 오셨다는데....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나고
교회에도 물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교회 괜찮은지 전화가 오고, 교회에 난리났다고
급하게 교회비상망을 돌리니까 연락을 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와서 땀과 물이 범벅이 되도록
온 몸이 흠뻑 젖어가면서 물을 퍼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 분들이 참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감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어떤 분들은 교회의 사정이
전혀 관심이 없었던 분들이 있었던 반면,
어떤 분들은 교회의 위급한 상황이 가장 큰 관심이었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저를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
나의 관심이 바로 '나'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통 세상적인 일들을 얘기할 때,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본인과 또는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좋은 대학 입학하는 것.
결혼 잘 하고, 좋은 자동차 타고, 넓은 평수에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얘기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좋겠죠.
하지만 이것만이 여러분의 관심이라면 잠시 멈춰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도록 하십시오.
주님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줄 아십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그 때는 노아 홍수의 때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말해 주는데,
홍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이와 같다고 하구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주님 다시 오실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뭐가 잘못되었나요? 먹고 마시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저도 장가갔고 가정을 이루었고 딸 둘을 두었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나요?
이것은 사람들이 영적인 일들, 즉 하나님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육적인 일들에만 몰두하더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일들,
세상적인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 이것이 말세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새벽에 잠깐 멈춰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힘써서 하고 있는 일들,
나의 모든 능력과 열정을 쏟아 부어서 이루고자 하는
나의 최대 관심사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실지 생각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성과 하나님 백성의 회복은
하나님의 최대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의 최대관심사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던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땠을까요?
3절입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여러분! 느헤미야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이 위로하신다."입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괴로움 중에 있던 자기 백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진
느헤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관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관심을 두고 기도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나 주변의 누군가에 관심을 두고 기도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큰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올해 84살이십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아들생각입니다.
특히 저 때문에 평생을 기도하십니다.
그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나의 관심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성도라면 하나님의 일들에 관심을 크게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관심사를 하나님의 관심에 일치시키시기를 바랍니다.
<설교2>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마음 느헤미야 1:1~3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향한 최고의 신앙고백이 이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앙고백을 '반석'이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의 이름 뜻 자체가 '반석'인데,
예수님을 감동시킨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이라고 하시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왔겠죠?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는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교회까지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들을 붙잡아 쓰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납니다.
느헤미야입니다.
학교다니실 때, 국사, 세계사 좋아하셨습니까?
역사 공부를 좀 할까 합니다.
1.느헤미야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남북으로 나눠진 시기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눠집니다.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남유다왕국은 BC586년에 바벨론에 에 멸망을 당합니다.
그때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그 후, 바벨론이 망한 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1,2,3차에 나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됩니다.
▪1차 귀환은 스룹바벨이라는 지도자를 따라
5만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귀환했고, 그들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1차 귀환 후, 약 80년 뒤,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귀환을 했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보니
1차 귀환 때, 성전을 재건해 두었지만
후손들이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과 혼인하는 등 타락해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타락의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다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철저히 회개하기를 외쳤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신앙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바벨론 침공 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포로 귀환 할 때마다 유대인들은
성벽을 재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주위 민족들의 극심한 반대와 방해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성벽을 쌓으려고만 하면 와서 심한 핍박과 방해로
성벽재건을 막았습니다.
지금이야 성벽이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당시 '성벽'이란 사람들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해주는 보호막이었습니다.
성벽은 나라의 자주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벽이 없으면 마치 집없는 아이처럼 무시당하고 공격해서
노략하기 딱 좋은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적들이 쳐들어와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훔쳐가고,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합니다.
불안하고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에스라의 2차 귀환 후, 약 12년 후의 일입니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그리고 느헤미야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수산궁에 있다고 합니다.
수산궁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왕궁이었습니다.
당시의 왕은 아닥사스다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초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궁에서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술을 맡은 관원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웨이터라고 하시던데,
당시 술관원은 비서실장에 버금가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항상 암살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에게 올리는 음료와 음식을 사전에
검사하고 맛을 보는 직책입니다.
왕이 가는 곳에는 항상 동행합니다.
공식석상이든 사적인 자리에도 늘 함께 합니다.
왕 옆에 함께 있어야 하니,
외모도 출중해야 되고요.
왕과 늘 대화를 해야 되니,
해박한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왕을 위험에서 지킬 수 있는 출중한 무예실력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술맡은 관원은 그만큼 중요한 직책입니다.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지 않고서는 임명받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명예도 얻었고, 재물도 , 권력과 힘도 가진 사람입니다.
그대로 그 지위에서 평안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관심은 페르시아에서
얼마나 더 권력을 누리느냐?
재물을 모으느냐? 어떻게 하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마음과 관심이 온통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의 형제들 중에 하나니가 유다에서 왔습니다.
하나니는 느헤미야의 친동생입니다.
그는 에스라가 주도한 2차 포로귀환 때, 귀환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느혜미야는 본국으로 귀환하고 싶었지만
왕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신하였으므로
왕이 허락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항상 마음이 예루살렘을 향해 있으니
예루살렘에서 하나니가 도착하자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은
당연히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형편을 물어보는 것~~~ 관심이 없으면 물어보지 않죠!!!
느헤미야는 관심이 예루살렘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불타버린 성벽은 잘 재건되고 있을까?
또 하나님의 백성들은 굶주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까?
외적의 침략으로 고통받지는 않았는지.....“
이것이 느헤미야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사실, 여기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 이런 관심을 가질까?
느헤미야는 오늘날로 말하면 이민 3세입니다.
이민 2세만 되어도 고국에 대한 관심이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민 3세입니다.
그것도 타국에서 성공한 이민 3세입니다.
게다가 느헤미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1절에 보면, 수산궁에 있습니다.
수산궁은 왕궁 중에서도 가장 좋은 궁입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수산궁은 금과 은과 상아와 지어진
정말 아름다운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할아버지 때에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의 후손으로 태어나
이민 3세지만, 포로3세였습니다. 엄청난 노력으로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페르시아제국의 성공한 관료가 되었으니
앞으로의 성공을 위해 어디에 더 관심이 있어야 할까요?
망해버린 예루살렘이 아니라 세계를 호령하는 페르시아 제국에,
페르시아 왕과 왕족, 귀족들과 인맥을 쌓아가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관심이 더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1절 “하가랴의 아들 느헤이먀의 말이라”
‘하가랴’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호와가 자취를 감추었다.
여호와가 어둡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왜 부모가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하가랴의 아버지, 즉 느헤미야의 할아버지 때
예루살렘 성이 함락 당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해 느헤미야의 할아버지와 온 가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할아버지가
그 아들의 이름을 ‘하가랴’라고 지은 것입니다.
패망한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그 아들의 이름 속에 담아서
아들에게 그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가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의 할아버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망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았고
다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하심에 대한 기대와 기다리는 모습을
아들 하가랴와 손자 느헤미야에게 까지 전수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민족을 다시 재건하실 여호와 하나님만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할아버지의 신앙이 느헤미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이 평안해지면 변질되기 쉽고, 방탕하기 쉽고,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힘을 다해 신앙생활에 주력하던 사람이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해지고, 넉넉해지면서
그런 열심이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잊지 않았고,
자기 백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늘 생각했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에 있던 동생이 오자마자,
유다 백성들의 안녕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제일 먼저 물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던
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땠을까요? 3절입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큰 환난을 당한다.
능욕을 받는다
예루살렘성은 허물어졌다.
성문들은 불탔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들으며 마음 아파합니다.
이 아픔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내 고국 예루살렘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했기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취를 감추지고 어둡게 했기 때문이다.
회복되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자취를 감추시고 어둡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관심이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으로 회복된 나라, 하나님으로 회복된 민족,
하나님으로 회복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들 마다 물난리가 항상 있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나고
교회에도 물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교회 괜찮은지 전화가 오고, 교회에 난리났다고
급하게 교회비상망을 돌리니까 연락을 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와서 땀과 물이 범벅이 되도록
온 몸이 흠뻑 젖어가면서 물을 퍼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 분들이 참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감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어떤 분들은 교회의 사정이 전혀 관심이 없었던 분들이 있었던 반면,
어떤 분들은 교회의 위급한 상황이 가장 큰 관심이었다는 겁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 즐 아십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그 때는 노아 홍수의 때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말해 주는데,
홍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이와 같다고 하구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주님 다시 오실 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뭐가 잘못되었나요?
먹고 마시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저도 장가갔고 가정을 이루었고 딸 둘을 두었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나요?
이것은 사람들이 영적인 일들, 즉 하나님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육적인 일들에만 몰두하더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일들,
세상적인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
이것이 말세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본인과 또는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좋은 대학 입학하는 것.
결혼 잘 하고, 좋은 자동차 타고,
넓은 평수에 좋은 집에서 사는 것 뿐이라면,
당연히 우리에게 필요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이지만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실 때,
4가지 밭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 좋은밭이 있는데,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은 모양은 다르지만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주시는 말씀, 그리고 영적인 일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금방 잊어버리거나,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오면
믿음을 포기해 버리는 성도들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런 마음들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좋은 밭, 좋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30배, 60배, 100배로 확장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마음이 되기까지
현재 내 마음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자취를 감추시지 않았는가? 살피고
하나님께서 다시 내 마음에 돌아오시고
다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주심으로
회복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 가운데
악한 우상과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자취를 감추시지 않도록 회개하고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에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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