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창세기 13:10-18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성도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성도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같은 길을 가도 같은 곳을 보아도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속에 두 사람, 아브람과 롯.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합니다. 눈을 들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눈에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롯이 눈을 들어 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인지?
아브람이 눈을 들어 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오늘은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본 것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실까요?
롯이 눈을 들어 보았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서로의 가축이 많아지면서 목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아브람과 롯이 갈등의 상황에 빠집니다.
그 때 아브람은 믿음의 선택을 합니다.
갈등 속에서 조카 롯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땅을 선택할 수있는
선택권을 롯에서 먼저 줍니다.
"니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니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말을 들은 롯이 눈을 들어 온 땅을 바라봅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인간적으로 롯의 선택은 현명한 것입니다.
많은 가축을 키우기 위해서는
최적의 조건인 물이 넉넉한 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물이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어땠는지 성경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1)여호와의 동산
여호와의 동산,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죠.
에덴동산에는 4개의 강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2)그리고 애굽 땅과 같다고 합니다.
애굽, 이집트에 유명한 강이 흐르고 있죠?
나일강이 있습니다. 나일강의 물로 인해
일년 내내 물이 풍족한 살기 좋은 곳입니다.
롯은 이런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하고 그리로 떠납니다.
롯의 선택이 잘못 되었나요?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목사가 되기 전에 국민은행에서 근무하고
전국 국민은행에서 최고 사원이었던 분이 있습니다.
돈의 흐름, 땅값과 집값의 흐름을
한번 눈을 들어 보면 오른다. 내린다. 어디에 투자해야 한다
이런 것이 눈에 바로 들어온 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렇게 찾아온답니다.
영적인 상담보다는 금융 상담을 받기 위해서.
좋은 땅이 있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
세상 사람들은 이런 롯의 선택을 현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롯의 선택을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왜 롯의 선택이 어리석은 선택일까요?
어떤 선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좋은 선택일까요?
첫째.눈을 들어 볼 때, 영적인 안목으로 영적인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았을 때,
어느 곳이 물이 넉넉한지, 가축을 키우기 좋은 곳인지,
투자 가치가 있는지 그런 물질적 안목은 있는지 몰라도
그 지역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안목없는 롯의 선택. 그것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선택에 있어
물질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상태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롯이 무엇을 보지 못했을까요?
물질적으로 부유해 질 수 있는 물질적인 땅은 보았을지 몰라도
자신을 죄로 망하게 할 영적으로 타락한 땅은 보지 못합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납니다.
장막을 옮겨가는데 어디에 도착합니까?
12절.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그런데 롯이 도착한 소돔 땅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13절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롭고 넉넉한 땅으로 보였던
소돔과 고모라 땅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사람들로 가득찬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곳입니다.
물질적, 육체적 안목으로 보지 말고 영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은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의 선택과 롯의 선택이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자신의 육체적, 물질적인 안목의 정욕으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와는 죄를 선택했습니다.
롯은 자신이 바라본 땅이 얼마나 죄로 인해 타락한 땅인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성적으로 더러운 음란과 동성애, 폭력과 온갖 악한 일들로 가득한 도시.
멀리서 안보였다고 합시다. 자세히 보면 롯이 바로 소돔으로 간 것이 아니라
도시들을 거쳐가면서 소돔으로 가까이 이동합니다.
그 도시에 롯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땅의 실체를 알았다면
그 땅을 떠나야 합니다.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지고
지극히 물질적인 생각, 육체의 번영과 안녕만을 구하는 삶.
물질적으로 풍족해 지면 하나님도, 믿음도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삶.
그것이 바로 롯의 잘못입니다.
(살전4:3~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둘째. 눈을 들어 볼 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롯이 바라본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여호와의 동산,
즉 에덴동산을 본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 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만 여호와의 동산을 보았지....
그 이후의 인류는 여호와의 동산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동산같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최고로 좋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 거제 호산나교회는 여호와의 동산 같아~~할렐루야~
그런데 최고로 좋은 땅이 여호와의 동산같은데
또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땅을 동급으로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롯의 시각으로 보면 가장 좋은 땅은 애굽땅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동산 = 애굽 땅
왜? 삼촌 따라 애굽 땅에 내려갔다가
애굽 땅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삼촌이 애굽땅에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이지만
롯은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다시 가나안으로 가려고 할까?
여기 애굽에 계속 있으면 더 큰 부자가 될텐데...
눈을 들어 잘 보아야 합니다. 보는대로 끌려갑니다.
믿음은 눈을 들어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경험한 대로 생각하고 경험한 대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무엇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애굽을 보고 경험하고 나니 애굽땅이 마음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보는 것마다 기준이 애굽땅이 되었습니다.
예)하영이 오피스텔 :
최고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자리잡은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복은 좋은 조건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너 있는 곳에서"
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과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아브람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왜 떠났나요? 목초지 때문에 다툼이 있어서 떠났을까요?
예! 맞습니다. 하지만 롯이 떠난 이유는 아닙니다.
롯이 떠난 이유는 아브람이 있는 곳보다
물이 넉넉하여 가축을 키우기 더 좋고,
여호와의 동산, 에덴 같고,
애굽땅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어보이는
더 좋은 땅, 아브람이 있는 곳보다
더 좋은 땅이 있어서 아브람을 떠난 것입니다.
그럼 아브람이 있는 땅은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복은 좋은 조건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땅에서 시작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이
더 좋은 땅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땅이 더 좋은 땅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땅이 더 좋은 땅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더 좋은 땅입니다.
애굽 땅 처럼 비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
하나님의 비전이 있는 곳.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땅.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기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기에
눈을 들어 볼 때, 하나님만 보여~~~
믿음의 안목을 가집시다.
롯과 아브람은 똑같이 눈을 들어 봅니다.
눈을 들어 보는 행위는 같았지만
주체가 달랐습니다.
롯은 자신이 눈을 들어 땅을 보고 선택했지만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눈을 들어 보게하셨습니다.
이 차이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보게 되는가로 연결됩니다.
롯은 물이 넉넉한 땅을 먼저 보게 되고, 그 땅으로 가게 됩니다.
롯은 눈을 들어 영적인 시각이 아닌 물질적인 시각으로 본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우리는 영적인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브람의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 내 시선을 좌우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 기준으로 바라봅니까?
하나님의 기준으로 눈을 들어 바라보십니까?
무엇인가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통해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색안경)
오늘도 하나님을 통해 눈을 들어 내 삶을 바라보는 믿음의 안목을 가집시다.
롯은 스스로 눈을 들어 본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들어 보게 하신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귀를 들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도 음성을 들을 시간을 주십시오.
아브람이 포기했습니다.
가진 것에 묶이지 않았습니다.
갈등을 믿음의 방식으로 풀고 나니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더욱 견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미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온 땅을 걸어보라.
발이 닫는 곳마다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음.
홀로 외로이 제단을 쌓는 모습
부를 쌓는 롯. 바벨탑과 비교.
하지만 믿음을 쌓는 아브람. 아브람의 제단.
딤전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시험과 올무를 겪게 됩니다.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가족을 잃습니다. 아내를 잃습니다.
두 딸과 근친상간하게 됩니다. 모압과 암몬의 가시같은 민족이 탄생합니다.
제단을 쌓기보다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에.....
온 세상이 좌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우할 때, 예수님께서는 좌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주님! 세상이 좌하면 나는 우하겠습니다.
세상이 우하면 나는 좌하겠습니다.
세상이 부를 택하면 저는 하나님을 택하겠습니다.
세상이 높은 바벨탑을 택하면 저는 제단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택하겠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여전히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아브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에 머문 아브람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보게 하신 것과
롯이 스스로 눈을 들어 땅을 선택하는 것은 대조적입니다.
롯은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했으며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망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대한 약속 뿐만 아니라 셀수 없는 자손에 대한 약속까지
아브람에게 약속을 확증해 주십니다.
땅과 큰 민족에 대한 약속을 더욱 든든히 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롯은 눈에 보이는 풍요로운 땅을 선택했지만
아브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선택합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장애물 속에서 기회를,
장애물 속에서 비전을,
장애물 속에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구름이 우리 앞을 막을 때에도
구름 뒤에 있는 태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의 눈을 가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도 주님이 우리 손을 놓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장애물 너머에 있는 주님의 축복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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