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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다툼이 일어나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합니다. (느헤미야 6장1-14절) 본문

구약/느헤미야 완료

다툼이 일어나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합니다. (느헤미야 6장1-14절)

행복으로초대 2017. 3. 16. 05:40

다툼이 일어나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합니다.  (느헤미야 6장1-14절)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면서 난 한번도 싸운적이 없습니다! 손 한번 들어보시죠?  어릴 때 싸움 한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가정에서 부부싸움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들 끼리 다툼도 일어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관계들 속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나라를 생각해도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비방하고 흑색선전에 모함이 판을 칩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나라가 반쪽이 난 것처럼 시끄럽습니다. 사상과 사상의 충돌로 서로 격렬하게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각종 이해관계에 따라 다툽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도 국가 간의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종교, 민족 간의 전쟁도 심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크든지 작든지 다툼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하죠. 이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툼이 일어날 때, 특별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살펴봅시다.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공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성문 문짝만 달면 완공입니다. 그러자 산발랏과 대적들이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드디어 느헤미야에 대한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3가지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합니다. 암살시도, 거짓모함, 거짓예언 등으로 느헤미야를 죽이든지 느헤미야를 곤경에 빠뜨려 지도력을 상실하게 하려 합니다

이 때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공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느헤미야는 충분한 힘을 가진 권력자였지만 세상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때, 관계가 틀어지면 서로를 향해 미움이 자리잡고 더 나아가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 사라졌으면 좋겠겠다. 죽이고 싶다는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살인응 하기도 합니다. 험담을 하고 악성루머를  퍼뜨리기도 하고 상대가 곤경에 빠지게 만들고 한번 당해봐라하면서 힘들게 합니다. 그렇게 곤경에 처하면 오히려 마음이 시원해지고 흔히 '꼬시다'고 하며 남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합니다. 특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툼이 일어날 때, 이렇게 한번 해 봅시다.   

 

첫째.다툼보다 사명에 초점을 맞춥시다.(1-4절)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에게 회담을 제의합니다. 회담장소는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이 오노평지는 예루살렘에서 약 35Km 떨어져 있는 곳이며 중간지점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산발랏의 영향아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산발랏이 군사를 매복시키기 쉬운 곳입니다. 산발랏의 회담제의에 느헤미야는 암살시도인 것을 바로 알아차립니다. 2절에 보듯이 그 회담제의는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회담제의를 느헤미야는 4번에 걸쳐 거절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회담제의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느헤미야가 산발랏의 암살시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3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거절할 때마다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느헤미야가 산발랏이 자신을 해하려 하는 의도를 알아차렸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거절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가장 최우선 과제이며 완공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공사를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집중해서 힘을 모아야 될 때이기 때문에 다른 일로 힘을 분산시킬 수 없음을 대적들에게 알립니다. 대적들에게 오히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해하려고 하는 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느헤미야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분쟁 중인 산발랏과의 관계에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최우선 과제, 즉 다른 말로 '사명' 그 사명을 성취하는 것에 더욱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닭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두 집 다 무난한 매상을 올리고 있었지만 같은 종류의 음식점으로서 늘 상대를 견제하는 눈치였습니다. 하루는 앞집에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원조 닭갈비'하고 써 붙였습니다. 간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손님이 늘어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맞은편 식당에서는  '진짜 원조 닭갈비'라는 간판을 더 커다란 글씨로 달아 놓았습니다.  양쪽 집의 싸움은 감정 싸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간판을 교체하려면 비용만 해도 엄청날 텐데 이제는 그런 손익계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상대를 누르고 말겠다는 자존심과 오기만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원조 닭갈비' 하면 '원조 특허 받은 진짜진짜 닭갈비'  '주의! 유사닭갈비!' '원조라고 다 원조냐?' 결국

두 닭갈비집은 멱살잡이하고 욕설에다 온갖 모함을 다 퍼부어댔습니다. 구경 중에 제일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더라. 흥미있게 싸움구경하던 사람들도 점점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에 질려 버렸습니다. 단골들 마저 혀를 차며 다른 먹자골목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래저래 양쪽 식당 모두 단골을 잃어버리고 아예 재기 불능, 텅 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제정신을 찾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단골로 다녔던 '닭갈비전문점'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손님들이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닭갈비판이 불판위에 놓여지면 손님이 절대로 뒤집거나 만지면 안됩니다. 시간이 되면 주인이 와서 뒤집고 익을 때까지 요리를 다 해줍니다. 혹시라도 손님이 만지면 난리가 납니다. 그렇게 불친절한 식당에 뭐하러 가나 하겠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님이 뒤집으며 익힌 닭갈비와 주인이 뒤집으며 익힌 닭갈비 맛이 다릅니다. 뒤집다가 뭘 넣고 이렇게 했다고 저렇게 했다가 신기합니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어요. 뭔가 맛이 특별해요. 그래서 한번 가본 사람은 함부로 주걱을 들고 요리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주인만의 노하우, 기술, 특별한 맛을 내는 양념들, 그리고 요리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끊임없이 더 나은 맛을 내기 위한 노력들이 엿보여요. 닭갈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닭갈비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서로 다투는통에 맛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간판 이름으로 허송세월하고 소모전을 펼치면 결국 망합니다. 하지만 음식점의 사명은 '맛'입니다. 더 나은 맛을 위한 노력과 자기 개발을 하는 식당은 사람들이 찾더라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맛을 낼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물론 언론을 통해서든, 여기저기 비치는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의 부정과 좋지 못한 모습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제 주변을 봐도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상 속에서 예수 믿는 모범을 보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 그런게 아닌데 그렇다고 일일이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이 때, 나 한사람이라도 이것에 집중합시다. 무엇에 집중하라구요? 사명에 집중합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나의 힘과 나의 능력을 무엇에 더 집중할지 생각을 깊이 합시다. 교회안에서도 성도들끼리 다툼이 일어날 때, 잠깐 멈추고 받은 사명을 생각합시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값주고 사신 교회를 생각하며 다툼으로 소모전을 펼치지 맙시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물러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사명을 이루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다툼의 중심이 되지 마시고 사명성취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다툼보다 바보처럼 기도합시다.(5-9절)

느헤미야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악성 루머를 퍼뜨려 모함을 합니다. 모함의 내용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다. 선지자를 세워서 예루살렘에 왕이 있다고 선포하게 하고, 그 왕이 되려고 한다. 그러니 느헤미야를 따르는 것은 반역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내는데, 봉하지 않은 편지로 보냅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의 모든 문서는 종이에 쓴 다음 끈으로 묶고 인장으로 날인해서 단단히 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달하는 과정에 누구도 그 내용에 대해서 읽어보지 못하도록, 또는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봉인해야 합니다. 외교 문서의 기본입니다. 그럼 이런 외교문서의 기본도 안된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문서의 내용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편지 내용의 진위를 떠나서 백성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나갈 겁니다.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지금 인터넷에 사실유무와는 상관없이 '카더라' 통신이라고 하죠. '카더라 아니면 말고'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글들을 보면 마음이 혹해서 여기저기 말을 옮겨 다니죠. 그럼 마치 전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만들어 집니다.

 

그럼 이런 모함을 느헤미야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8절~9절을 보십시오.

  첫번째 반응은 참 어처구니 없게도 간단합니다. '너의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산발랏과 대적들의 이런 모함에 대해 느헤미야는 흥분하거나 일일이 변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착하게 대응합니다.

"그건 니가 지어낸 이야기니 사실이 아니다" 이 한마디로 끝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고 바른 목적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떳떳합니다. 처음엔 억울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일이 변명하며 맞부딪쳐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두번째 대응을 어떻게 합니까? 9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비록 모함을 받고 억울한 상황이 올지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소리를 높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함을 당할 때, 기도하십시오. 아무도 없는 교회당 안에서 소리지르며 하나님 앞에서 울며 마음을 토해내던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변호하십니다. 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모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시며 때가 되면 나를 변호하실 것을 믿는다면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십시오. "바보처럼 기도합시다." 사람들이 뭐라해도 바보처럼 기도만 합시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소리내지 말고 억울하고 분해도 바보처럼 살아봅시다.

  제가 지금까지 섬겼던 교회의 목사님들중 성향이 극과 극인 두 분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누군가가 모함을 하고 헛소문을 퍼뜨리면 발본색원해서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내서 박살을 내라고 가르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또 다른 한 분은 침묵하고 기도하고 오히려 더 화평하라고 가르치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두 분 중 어느 분이 맞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교회로 봐서는 침묵하고 기도하는 편이 더 낮더라구요. 제 까맣게 타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때 예수님을 생각하고 오히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일일이 다 변명하고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찾아내서 싸워봐야 뭐하겠습니까? 교회만 소란해지고 진흙탕 싸움만 되고 감정만 상합니다. 오히려 눈덩이처럼 일이 커지고 문제가 더 어려워 집니다.

  전에 있었던 교회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던 날, 한 장로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다 압니다. 억울한 일 겪어도 말 한마디 안하고 참아내고 인내한 것들 다 압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이 말씀에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좀 바보처럼 삽시다. 바보처럼 기도합시다. 어렵겠지만 바보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똑똑하고 아무에게도 지지 않던 싸움닭같은 나를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내 자아는 죽이고 바보로 다시 태어납시다. 성경에 나오는 한 명의 바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장 7절)

예수님도 그의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실 때까지 묵묵히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참 좋은 찬양아닙니까? 바보처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셋째. 다툼 중에도 말씀을 생각합시다. (10-14절)

암살시도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악성 루머를 퍼뜨려 모함을 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바보처럼 기도함으로 위기를 넘어갑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스마야 선지자를 매수해서 거짓예언을 하게 하고 느헤미야를 함정에 빠지도록 유인합니다.

 

선지자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었었습니다.  당시 선지자들은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야가 스마야의 안부를 물어보려고 찾아갑니다. 무슨 큰 병이라도 걸렸나 해서 찾아가 보니 스마야가 느헤미야를 크게 걱정해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적들이 너를 죽이러 올거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안에 머물고 문을 닫자. 거기는 안전하다"

 

스마야가 느헤미야의 안전을 걱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아주 무서운 함정입니다.

여러분은 눈치 채셨습니까? 스마야의 제안에는 어떤 헛점이 있을까요? 느헤미야는 이 헛점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느헤미야의 대답을 통해 스마야의 제안의 헛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여기서 '나 같은 자'라고 할 때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총독으로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스마야의 제안은 느헤미야가 백성들로부터 받고 있는 절대적인 지지율을 떨어뜨리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도망갔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게되면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며 따랐던 백성들이 느헤미야에게 실망할 것이고 성벽 재건 공사에 치명타를 먹일 수 있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나 같은 몸이며 누가 외소에 들아가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스마야가 같이 숨자고 했던  '하나님의 전 외소'는 성전 현관과 지성소 사이의  '성소' 를 가리킵니다.  율법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스마야의 제안을 따르면 100%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느헤이먀와 같이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 제사장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 숨어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성소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율법을 범하게 되고 성소에 들어가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에 따라 징계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12절 처럼 스마야가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알아보니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뇌물을 받고 거짓 예언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 예언을 했던 자들이 더 있었는데, 그들이 여선지 노아야와 그 남은 선지자들도 스마야와 같이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자 했던 자들이 더 있었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를 넘어뜨리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함정들이 곳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느헤미야를 삼키려고 호심탐탐 노리던 시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넘어지지 않고 모든 위기의 순간들을 무사히 넘어갑니다.

 

느헤미야가 이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에도 범죄치 않았던 것은 느헤미야가 말씀 속에 깨어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스마야의 제안을 듣는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을 겁니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어겨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것이 합당한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과 있지 말아야 할 곳,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정확히 구별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소에 대한 율법의 규례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좋은 생각이었지만 말씀에 합당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생명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말씀 속에서 늘 깨어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