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부르심2일 사도행전9:4-9 사울아 사울아 본문
사도행전9:4-9 사울아 사울아(부흥기도주간 부르심2일)
사울이라는 이름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포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살기 등등했던 그 이름 사울!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부르시고
인생의 궤도를 변경시키십니다.
박해자 사울에서 전도자 바울로 인생이 변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 사울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함께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오늘 말씀 본문 안에서만 해도
몇 달을 설교할 수 있지만, 오늘은
사울아~사울아~ 이 부르심에만 집중해서
두가지 메시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지독한 유대교 신자이며,
율법주의자 정통 바리새인이었고
당대 최고의 유대교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사울은 유대교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의 평생의 행적을 보더라도 행동파입니다.
그가 배운 유대교의 관점에서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은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같은 자들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서
어떻게 하든지 기독교를 멸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사명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사울은 당시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기 위한 공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다메섹은 로마의 식민지였지만
로마 총독이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통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메섹으로 대거 이동해서 그 곳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1절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합니다.
맹렬한 속도로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는 사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울은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열심이었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
사울아~사울아~ 이 음성에 담긴 메시지.
오늘 역시 두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시선을 하늘을 향해 들어보십시오.
하늘에서도 사울은 유명인사였습니다.
아마 집중적으로 관심을 받는 관심대상이었을 겁니다.
※사울아 사울아~부르시는 예수님께서도
사울이 무엇으로 유명한 사람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사울은 하늘에서도 ‘박해자’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아~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프면 예수님이 아픕니다.
성도가 아프면 예수님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우리 영주 시민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저는 늘 저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지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저 때문에 성도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데,
때가 되면 나누려고 합니다.
퇴계 이황,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처럼
저에게도 호가 있습니다.
저같은 찌끄러기 같은 사람이
호를 지어서 죄송합니다.
저의 호는 바보입니다. 바보 김창태.
저를 바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제 아내가 저보고 교회 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합니다.
네 정말입니다. 저는 사실 교회 밖에 모릅니다.
여러분처럼 사회 경험도 별로 없고
여러분처럼 전문적인, 수준높은 지식도 없습니다.
교회 밖에 모르는 바보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평안할 수만 있다면,
제가 어떤 말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교회가 은혜로울수만 있다면,
제가 희생해도 되고 가난해도 되고 힘들어도 됩니다.
교회가 아프지 않고 교회가 힘들지 않고
교회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제가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도
저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천번 수만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만 지킬 수 있다면 제 무릎하나.
제 자존심 하나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
더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게 사니 어떤 사람들은 정말 바보처럼
아무렇게나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려도, 욕해도, 비난해도, 제대로 반항하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분과 싸워서 교회가 깨어진다면,
예수님이 아프시니까 저는 바보처럼 죄송하다고 하고
바보처럼 웃습니다. 예수님만 괜찮다면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영주시민교회 성도 여러분~!
항상 교회를 아껴주십시오. 교회를 사랑해 주십시오.
교회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교회를 위해 소리를 낮추고, 감정을 내려놓고
교회를 위해 날마다 죽어주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사울아~사울아~
이 부르심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실까요? 찾아볼까요?
맹렬하게 다메섹을 향해 달리던 사울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어떻게 부르셨을까? 궁금했어요.
계속 묵상해 봤어요.
(무섭게) 사울아~사울아~(이놈의 시키) 이렇게 하셨을까?
(따뜻하게) 사울아~사울아~이렇게 하셨을까?
묵상의 결론은 따뜻하게 정답게 사울아~사울아~
이렇게 부르셨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는 두 명의 추적자가 있습니다.
첫 번째, 추적자는 사울입니다.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는 추적자 사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추적자가 있습니다.
바로 추적자 사울을 추적하는 추적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집요하게 사울을 추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박해자 사울임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살기가 가득하고 분노가 가득한 사울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뜻하게 그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기 좋아하십니다.
제가 설교할 때, 자꾸 제 이름을 부르면서
창태야~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실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며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울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품에 안으시기 위해 끝까지 추적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박해자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적자 예수님이 박해자 사울을 추적해서
전도자 바울로 변화시키기 위해
사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왜 변화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도 변화가 없을까요?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추적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임으로 인한
자기의 의와 열심을 채우기 위합니다.
결국 사울의 추적은 세상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변화되지 못할까요?
우리가 세상을 추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추적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세상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합니다.
그러면서 나를 추적하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추적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합니다.
세상을 얻기 위해 세상을 추적했던 나를 깨닫고
이제 뒤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를 추적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끝까지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추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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