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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부흥의 행렬에 동참합시다2-느헤미야 8장 13절~18절 본문

구약/느헤미야 완료

부흥의 행렬에 동참합시다2-느헤미야 8장 13절~18절

행복으로초대 2017. 4. 11. 21:31

 

부흥의 행렬에 동참합시다2 - 느헤미야 8장 13절~18절

 

'더' 와 '이제'라는 단어를 쓰는 부흥의 사람들이 됩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된 영적 부흥은 계속됩니다. 13절에 그 이튿날, 즉 7월 2일, 정월 둘째날이 되었습니다. 하루 전 뜨거운 부흥회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백성들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에스라를 찾아 왔습니다. 에스라를 찾아온 이유를 13절에는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흥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부흥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두가지 단어를 함께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한다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두가지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두가지 단어를 알고 앞으로 많이 써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부흥의 단어 '더'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입니다.

지금도 어느정도는 말씀을 알고 있으나 더 알기 원합니다. 더 알기 원합니다. 더, 더, 더 알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나요? 그들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지도자, 제사장, 레위사람들 입니다. 일반 백성들 보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더 알고자 했습니다.그들의 지위나 직분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더 율법을 잘 아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말씀을 더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더 연구하고 더 공부하고 더 말씀을 정확하게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이 그 사람의 성경에 대한 점수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무섭고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그럴꺼야 라고 생각뒤에서 당연히 난 그런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영적인 가면을 써 버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참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이 저에게 자주 전화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분 전화를 받고 그 장로님 이름이 액정화면에 딱 뜨면 순간 긴장을 합니다.

"여보세요! 장로님!"

"아이고 목사님! 궁금한게 있어서 도저히 못 참겠어요. 목사님,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왜 긴장하는 줄 아시겠죠? 처음에는 이런 전화를 받고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요. 왜냐하면 장로님 정도 되시면 이걸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닐꺼고 목사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나 모르나 테스트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장로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자꾸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해서 당황하셨죠? 그런데 성경을 보다보니 정말 모르겠고 그렇다고 다른 성도들에게 물어보려니까 솔직히 장로나 됐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까봐 쪽 팔리기도 하고, 그래서 내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김목사님한테 물어보는 겁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장로지만 성경 정말 모릅니다. 그게 너무 답답하다고. 성경 모르는 거 부끄럽다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셨어요. 저는 그 분에게 자연스럽게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정말 성경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시고 항상 성경을 읽는 모습이지만 더 알기 원하고 부족함을 알고 더 채워나가시는 모습에 고개를 숙입니다.

 

성경을 더 알기 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흥에는 영적인 일에 '더'라는 말이 붙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영적인 일에 '더'라는 말을 붙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흥의 단어 '이제'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입니다.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더' 배워가는 중에 중요한 부분에서 멈추게 됩니다. 아마 여러가지 절기와 규례의 말씀 중에 초막절에 대한 부분에서 걸렸습니다. 요즘 계속 설교에서 나오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 광야생활을 하며 초막을 쳤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간단합니다. 15절에 나오는대로 각종 나뭇가지나 조각천 같은 것을 엮어 임시로 거할 수 있는 천막이나 오막살이를 만들 후 7일 동안 그 곳에서 가장 간단한 삶을 삽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 광야생활 가운데서도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불같이 뜨거운 광야에서, 물과 먹을 것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것을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의 의미를 알고 나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았습니다.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구해 주신 하나님, 광야같은 황무한 땅 예루살렘에 왔지만 보호해 주셔서 이제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돌보심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결단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통해 초막절의 규례를 밝히 알고 나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가 말씀을 깨달았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7월 15일부터 시작되는 초막절, 당장 2주 앞으로 다가온 가장 가까운 절기인 초막절을 잘 지켜야 한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초막절의 규례대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17절에서 말씀하듯이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초막절을 지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을 한번도 지킨 적이 없다고 했죠? 초막절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입니다. 초막절은 율법에 글자로만 남아있는 절기였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성경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도 성도들이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과 같은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딱 걸리는 때가 있습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연결되는 말씀이 주어질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 부흥의 단어를 쓰십시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순종해야죠. 깨달은 대로 행해야죠. 미루지 말고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깨닫고 난후, 그대로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17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이에 크게 기뻐하며' 백성들은 말씀을 실천해 보고 나니까 이렇게 좋은데 왜 진작 실천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안해서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나면 큰 기쁨이 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말씀대로 살면 말로 표현하지 못할 큰 기쁨이 옵니다. 요한복음 13장 17절에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즉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해집니다.

 

그럼 이런 큰 기쁨이 언제 오게 됩니까? '이제'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는 '이제'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입니다. 부흥의 단어를 쓰십시오. 말씀을 깨달았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흥의 단어 '더' 부흥의 단어 '이제'를 기억하십시오. 이제 우리 모두 부흥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