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태 목사의 하나님과 동행하기365
베드로전서1:13-17 참좋다2-거룩이 참 좋다 본문
지난 주일 말씀 기억나시나요?
무엇이 참 좋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참~ 좋다" 할렐루야!
믿음이 참 좋은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의 방패이고,
믿음이 하나님을 보는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참 좋습니까? 믿음이 참 좋습니다.
오늘은 참 좋다 두번째.
“거룩이 참 좋다”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참 좋습니까? 거룩이 참 좋습니다.
이제부터 왜 거룩이 좋은 것인지 말씀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거룩이 참 좋은 이유, 첫번째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13절)
13절을 보십시오.
말씀은 어떠한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어떤 자세인가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13절)라고 합니다.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의복의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맨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졸라매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허리를 졸라매는 것은 항상 준비되어 있는 자세입니다.
같은 의미로 근신하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근신하다’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어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까요?
13절 다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까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주님의 재림 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주님의 재림 때까지,
무엇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무엇을 위해 깨어 있고,
무엇을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할까요?
다시 13절입니다.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 은혜는 5절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온전히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저를 따라해 볼까요?
‘나만 바라봐’
이 말을 누가 하실까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시는 말입니다.
"나만 바라봐"
이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이것이 거룩입니다.
‘나만 바라봐’
외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거룩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의 시선을 빼앗지 못하는 상태가 거룩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태가 거룩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러면서 주 예수님과 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부귀, 명예, 행복, 즐거움, 자랑
이런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나의 시선을 빼앗지 못합니다.
오직 내 눈에는 누구만 보입니까?
‘나만 바라봐’ 하나님만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향해 한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일 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합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무엇이든 혼합할 때 거룩은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는 것을 금하셨고,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는 것도 금하셨습니다.
또한 육축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는
간음죄를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를 향해서만
걸어가셨기 때문에 거룩하십니다.
마음이 나눠지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의 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사람들이 외칩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지만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치열한 싸움입니다.
나만 바라봐! 하시는 하나님과 여기도 저기도 봐라.
하나님 밖에도 세상에 좋은게 많다고 하는 사단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만 바라봐 하나님에게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이 참 좋은 두번째 이유는
거룩이 하나님을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14~17절)
14절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는 각종 더러운 욕망들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구원받기 전에는 무지하여 인간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 쾌락에 취해 허우적허우적 거리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죄를 쌓기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공과 명예와 권세만이 인생의 목표였고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디도서 3장 3절부터 보시면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전에는 어리석은 자, 순종치 아니한 자, 속은 자,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 가증스러운 자, 피차 미워한 자였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런 사람이 되었던 이유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본실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해 줍니다.
한마디로 하면 우리 아버지가 한 때는 사단마귀였다는 말입니다.
‘친구’라는 영화에 김광규 배우분의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니 아버지 뭐하시노?” 한 때 우리의 대답은 “사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대답은 뭡니까? “니 아버지 뭐하시노?”
하나님입니다“ 예! 우리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거듭났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14절에는 우리를 ‘자식’이라고 하며
17절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닮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 우리가 닮아야 할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지를 15,16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이 ‘거룩한 이’라고 하며,
16절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형관련 뉴스 중에 슈퍼맨처럼 성형한 남자, 원더우먼처럼 성형한 여자,
바비인형 처럼 전신을 성형한 여자를 봤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외모만 닮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영혼까지 슈퍼맨이, 원더우먼, 바비인형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온통 생각 속에는 슈퍼맨밖에 없는거죠. 원더우먼, 바비인형 밖에 없는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버지를 닮는 것은 아들됨의 증거입니다.
내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배워가고 있습니다. 알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만 보면 됩니다.
닮아가려면 봐야 합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저는 자주 와이프 얼굴을 봅니다. 제가 자꾸 보고 있으면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어떻게 생겼는지 볼려고,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입에 주름은 어떻게 생겼는지,
점은 어디 붙었는지?” 이러면 ‘퍽’. 제 아내가 점이 좀 많은데,
왼쪽 귀 뒤에 보면 점이 있어요. 이산 가족 되면 왼쪽 귀 뒤에 점으로 찾아야지, 그럽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성도님들이
‘니 김창태 목사님 딸이지? 꼭 닮았네, 말 안해도 알겠다.“ 그랬답니다.
당연한 거죠. 얼굴을 차근 차근 살펴봅니다.
아버지와 아들 딸은 이렇게 닮습니다. 얼굴 뿐만이 아닙니다.
딸들을 볼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얘들 모습 속에서 제 모습이 보여요.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좋은 점만 잘 배웠으면 좋겠는데, 아이들 앞에서 좋은 점만 보여주기는 참 힘들어요.
아이들이 아버지된 저를 보면서 좋은 점, 나쁜 점 골고루 다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배우는 것 같은데 내가 닮을 만한 구석이 없는 것이 문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누군가를 보면서 배워서 누군가를 닮아야 한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니 이제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려고 하자.
그럼 내 딸들도 하나님을 닮겠지.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속 봅니다.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갑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갑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칠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자!
내가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주면 내가 하나님을 닮겠지?
그럼 내 모습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이들도 보겠지?
그럼 아이들이 하나님을 닮은 아이들이 될거야!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것을 다섯 글자로 뭐라구요? ’나만 바라봐‘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만 바라보십니다.
우리도 거룩하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봐도 내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한번 채워봤더니 밑빠진 독이요 끝없는 욕망덩어리라 헛될 뿐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하여 바라보며 살면 돈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세상 쾌락을 사랑하여 바라보며 살면 쾌락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섯 글자 뭐라구요? ‘나만 바라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다보니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을 점점 닮아갑니다.
이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동안 즐겨왔던 모든 것들이 어느날 갑자기 역겹고 지루하고 재미없어 집니다.
헛됨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이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이 참 좋습니다.
거룩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만 바라봐’ 하나님만 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만 내 마음에 채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거룩이 참 좋은 이유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참 좋습니까? 거룩이 참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구만 바라보라구요? ‘나만 바라봐’
하나님 아버지만 바라봄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룩이 참 좋은 두 번째 이유는 거룩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18~19절)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거룩을 정직하게 사는 것,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 깨끗하게 사는 것,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 인간의 모든 정욕을 제어하며 사는 것,
그래서 죄악 세상을 떠나 산 속에 파묻혀
속세와 인연을 끊으라는 식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른 세상 종교에서도 다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거룩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종교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도를 많이 닦고
선을 많이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룩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거룩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얼마나 존귀한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됩니다.
여러분, 거룩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룩해 질 수 있을까요?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거룩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거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알고 18절과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구속되다’는 말은 전쟁 포로나 노예의 자유에 대한 몸값으로
지불된 돈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대가를 치르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다는 말일까요?
18절을 보시면,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너희 조상은 ‘이방인’들입니다. 즉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망령된 행실입니다.
망령된 행실은 다른 곳에서는 우상숭배나 하나님과 대조적인
이교도들의 우상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변절한 자들에 대해
경멸적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즉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우상 숭배의 노예가 되어 쌓았던 죄 값에 대해
그 대가를 대신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값으로 지불한 것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죄로부터 구속함의 댓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무엇으로만 될까요?
19절입니다.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킬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3:7에서 그리스도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월절 어린양을 생각하십시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양이 흘린 피는 흠없고 점없는 것입니다.
완전무결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모든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값이 됩니다.
거룩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한 분이십니다.
때문에 거룩은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거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얻습니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님을 통해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값주고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망령된 행실 속에서 멸망당한 우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를 먹고 마시고 죄를 입고 죄와 더불어 살며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었던 우리였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아
구원받고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줄 모르는 상태,
아니요,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죽었는데 살았다고 착각하며 살다가 끝에 가서야
아! 내가 죽었구나하고 깨닫게 되겠죠?
죽었다고 해서 멈춰진 상태가 아닙니다.
죽었다는 말은 세상 풍속을 좇는 삶에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정욕을 가득채우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세상 쾌락에 대해서는 파닥파닥 뛰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사는 것에 대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참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열심도 없고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상태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고통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한번 고통을 당하고 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난 상황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숨을 자유롭게 쉬며 숨 쉬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한 숨이 어떤 분에게는 참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전 섬기는 교회의 한 장로님이 천식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 분은 계단이 공포였습니다.
한 두 계단 올라가서 숨을 몰아쉬고 쉬었다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오시면 제가 그 분을 엎고 계단을 올라갔던 기억이 몇 번 있습니다.
정말 몸이 많이 아팠던 때, 아니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억눌렸던 때가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힘들었던 기억, 고통의 순간은 다 있었을 겁니다.
그럼 그 순간을 벗어난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장담컨대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건강이 지금의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사단과 마귀를
우리의 아비로 삼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그 순간,
하나님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그 순간이 우리에게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고통이 때였음을 잊지 마십시오.
출애굽 한 후에 여전히 자신들이 노예로 살던 애굽이 좋았다고 하면서
원망과 불평을 터뜨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지 맙시다.
노예 생활이 좋다니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영광스러운 하늘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이 땅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놓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하나님 없이 살 던 그 때는 우리에겐 고통이었고 소망없는 삶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좋은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우리가 늘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없이 살던 고통의 삶,
소망없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행복은 예수님의 보혈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주는 특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멘이시죠?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베드로전서 1장 2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은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믿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살아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21절에 뭐라고 합니까?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
예! 이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거듭나 새 인생을 허락 받았으면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여러분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증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함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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